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균열

눈앞에서 거대한 트롤이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진동이 컨트롤러를 타고 손바닥까지 울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헤드셋 안쪽으로 스며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 스킬 이펙트가 화려하게 터지며 트롤의 생명력이 바닥을 찍는 순간, ‘클리어’ 문구가 허공에 팝업되었다. 짜릿한 성취감과 함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젠장, 드디어 끝났네.”

김도윤은 깊은 한숨을 쉬며 헤드셋을 벗었다. 가상현실 속 강렬했던 태양빛은 사라지고, 그의 작은 원룸에는 오직 스탠드 불빛만이 나른하게 흐르고 있었다. 헤드셋을 벗은 귀에는 게임 속 웅장한 배경음악 대신, 에어컨 실외기 소음과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희미한 소음만이 맴돌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현실의 소리들.

밤 11시 30분. 모니터 시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의자에서 몸을 쭉 펴자 등뼈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고된 사냥이었다. 한 시간 넘게 트롤과 씨름한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오늘은 레어 아이템을 득템했으니 피로감이 덜했다.

“아, 피곤해 죽겠네. 물이나 마셔야겠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발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늦은 시간, 혹시라도 아랫집에 소음이 될까 조심하는 습관이었다. 좁은 복도를 지나 싱크대 앞에 섰다. 차가운 물을 한 잔 따르고 단숨에 들이켰다. 목울대가 시원하게 열리는 느낌이 좋았다.

그때였다. 쨍그랑! 맑은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도윤은 몸을 굳혔다. 숨소리마저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거실 겸 침실 공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뭐지? 내가 뭘 떨어뜨렸나?’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방 안을 훑었다. 침대 옆 협탁, TV 선반, 창가 테이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컵도 멀쩡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착각이었나…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보네.”

자조 섞인 혼잣말과 함께 도윤은 다시 싱크대로 향했다. 마른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싱크대 상부장 문이 *스윽* 하고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였다.

“어?”

도윤은 눈을 비볐다. 분명 닫혀 있었는데. 다시 상부장 문을 꼭 닫았다. 낡아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가, 틈새가 벌어졌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 한참 게임 게시판을 뒤적였다. 득템한 아이템 정보를 검색하며 다음 사냥터를 구상했다. 가상현실 속 모험을 계획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방금 전 일들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유리잔 소리, 열린 상부장 문. 뭔가 찝찝했다. 피로 때문에 예민해진 걸까.

‘불 끄고 자야겠다.’

컴퓨터를 끄고 스탠드 불을 껐다. 방 안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침대에 몸을 뉘였다. 평소 같으면 금방 잠이 들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눈이 말똥말똥했다. 왠지 모르게 싸늘한 기운이 방 안에 감도는 것 같았다. 겨울도 아닌데 이불 밖으로 나온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거실 한구석에 놓인 그의 오래된 책장이 흔들렸다. *끼이익… 쿵!* 낮게 삐걱이는 소리에 이어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도윤은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발광하듯 뛰었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더듬어 침대 옆 스탠드 스위치를 찾았다. 스위치를 올렸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 뭐야?”

그는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책장 쪽으로 비췄다. 얇은 전공 서적 한 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씨, 깜짝 놀랐네. 책이 쓰러진 거였어?’ 그는 허리를 숙여 책을 주워 올리려 했다.

바로 그때, 핸드폰 플래시 빛이 비추는 시야 끝에서, 바닥에 놓여 있던 작은 인형이 *스윽* 하고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도윤이 어린 시절부터 간직했던 낡은 토끼 인형이었다. 마치 누군가 발로 툭 민 것처럼, 멈췄다가 다시 *스윽* 움직였다.

“야! 거기 누구 있어?!”

도윤은 소리쳤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인형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플래시 빛이 흔들렸다. 방 안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도윤은 인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착각일 리 없었다. 분명 움직였다. 혼자 살고 있는 이 작은 원룸에서, 저 인형을 움직일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인형과의 거리를 벌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바닥에 있던 그 낡은 토끼 인형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치 투명한 손에 붙잡힌 듯, 흔들림 없이 수십 센티미터 위로 상승했다. 핸드폰 플래시 빛이 인형의 낡은 보풀들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도윤은 숨을 멈췄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흔들렸다.

토끼 인형은 허공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그리고는 아주 느리게, 그를 향해 *돌아섰다*. 검은색 단추 눈동자가 정확히 도윤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으아악!”

도윤은 공포에 질려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플래시 불빛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며 방 안은 다시 어둠과 그림자에 잠겼다.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쿵! 쿵! 쿵!

어둠 속에서 무언가 천장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발자국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는 점점 그에게 가까워지는 듯했다. 도윤은 벽에 바싹 붙어 몸을 웅크렸다.

‘뭐야… 이게 대체 뭐야…!’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그의 작은 아파트를 잠식하고 있었다. 가상현실 속 몬스터보다 더 기괴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지금 이 공간에 함께 있었다.

온몸을 덜덜 떨고 있는 도윤의 귀에, 아주 희미하고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와….”*

그것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같았다. 아니, 그의 바로 옆에서,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소름이 돋아 머리끝까지 쭈뼛 섰다.

도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공포에 마비되어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등 뒤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를 *스윽* 하고 스치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은 명백한 *접촉*이었다.

“으아악!”

도윤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로 뛰어올랐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좁은 방 안에 갇힌 채, 그는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그저 피곤해서 생긴 환각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의 집에 알 수 없는 균열이 생긴 것일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