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벽과 그림자
새벽 두 시, 도시의 심장이 고요히 멎은 시간. 고층 빌딩 숲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검푸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축축한 아스팔트 위에서 춤을 추고, 빗줄기는 끈질기게 창문을 두드렸다. 서은율은 그 소리마저 해독하려는 듯, 눈을 감고 깊은 숨을 쉬었다. 그의 작은 서재는 책과 알 수 없는 기묘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놀랍게도 먼지 한 톨 없었다. 모든 것이 은율의 손길이 닿는 곳에, 계산된 듯이 놓여 있었다.
고요를 깬 건 날카로운 진동음이었다. 책상 위, 오래된 디자인의 휴대전화가 지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발신인은 김형사. 이 시간의 김형사라면, 필시 ‘어려운’ 사건일 터였다. 은율은 픽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김형사, 제발 이번엔 사라진 고양이 수색 같은 건 아니길 바라네.”
수화기 너머로 김형사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서… 서은율 씨!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아주… 골치 아픈 사건입니다.”
“골치 아픈 사건은 형사님의 전문 분야 아닌가. 나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이라는 뜻이고.”
“불가능? 불가능 정도가 아니라…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김형사의 목소리에는 초조함과 함께 미약한 공포가 섞여 있었다. 은율은 희미하게 흥미를 느꼈다. 김형사가 저 정도로 동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주소 불러.”
짧은 지시 후, 은율은 전화기를 끊었다. 빗소리는 여전했지만, 그에게는 이제 사건 현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낡은 코트를 걸치고 문을 나서는 그의 눈빛은 이미 어둠 속 저편의 실마리를 쫓고 있었다.
***
강남의 한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펜트하우스 층은 이미 경찰 통제선으로 가득했다. 비상등의 붉고 푸른빛이 빗물에 반사되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은율은 익숙하게 통제선을 넘어섰다. 경계를 서던 젊은 경찰이 제지하려 했으나, 김형사가 황급히 달려와 그를 가로막았다.
“서은율 씨, 여기입니다.”
김형사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 흔들리고 있었다. 은율은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적막했고,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숨을 멈춘 것만 같았다.
“피해자는 강태준 씨입니다. 아시죠? IT 기업 ‘크로노스’의 창립자이자, 최근에는 비상장 주식 투자의 귀재로 불리던 인물.”
김형사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자산가였다. 최근에는 도시의 숨겨진 유물이나 이능력자들의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소문도 들렸다.
“사망 시각은 대략 두세 시간 전으로 추정됩니다. 사인은 칼에 의한 과다 출혈.”
드디어 사건 현장인 서재 문 앞에 섰다. 굳게 닫힌 문에는 조심스럽게 지문 채취용 분말이 뿌려져 있었고, 주변은 이미 과학수사팀의 활동 흔적으로 가득했다. 은율은 문고리를 가볍게 쓸어보았다.
“밀실입니다.”
김형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한마디에 모든 설명이 함축되어 있었다.
“창문은 모두 이중 잠금장치로 안에서 완벽하게 잠겨 있었습니다. 방범창, 방탄 유리까지 완벽했죠. 발코니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에서 걸쇠가 굳게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강태준 씨는 혼자 살고 있었고, 비서와 가사 도우미는 오후에 퇴근한 상태였습니다. CCTV는 층별 복도와 엘리베이터에만 설치되어 있는데, 사망 추정 시각에 이 방으로 접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지문 감식 결과, 강태준 씨 본인의 지문 외에는 다른 사람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어요. 문 잠금장치에도, 창문에도, 어디에도.”
“그럼 강태준 씨가 스스로 문을 잠그고 자살했다는 말인가?” 은율이 무심하게 되물었다.
김형사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의 손에는 흉기가 쥐어져 있지 않았어요. 흉기는 방 한가운데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목격자가 있습니다.”
은율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목격자라니?”
“경비실 직원이 밤중에 순찰을 돌다가 이 펜트하우스 층에서 희미하게 비명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뭔가 떨어지는 소리도요. 곧바로 올라와 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잠겨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외부에서 육안으로라도 창문을 확인했지만, 그마저도 굳게 닫혀 있었다고 합니다. 비명 소리를 들은 시각과 사망 시각이 거의 일치해요.”
은율은 잠시 침묵했다. 비명, 잠긴 문, 외부 침입 흔적 없음, 그리고 흉기가 피해자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음. 완벽한 밀실 살인. 아니, 적어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만한 조건이었다.
“문 열어봐요.”
김형사는 한숨을 쉬며 특수 제작된 도구를 이용해 문을 개방했다. 묵직한 철제 문이 천천히 안으로 열리자, 내부의 광경이 드러났다.
서재는 넓고 호화로웠다. 벽면 가득 책장이 들어차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고가의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 강태준은 거대한 페르시아 카펫 위에 쓰러져 있었다. 흰 셔츠는 붉은 피로 흥건했고, 눈은 아직도 무언가에 놀란 듯 크게 뜨여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은율은 망설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과학수사팀원들이 조심스럽게 비켜섰다. 그는 시신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방 전체를 훑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방의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김형사는 은율의 뒤를 따르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어떻습니까? 정말… 말도 안 되죠?”
은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강태준의 시신을 지나,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는 벽에 걸린 추상화, 정교하게 짜인 책장,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까지, 모든 것을 스캔하듯 훑어 나갔다. 마치 이 방의 공기, 벽의 질감, 흐르는 시간의 잔상마저 읽어내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서재 한쪽 벽에는 고풍스러운 작은 자개함이 놓여 있었다. 그 자개함 옆, 벽면에서 아주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 눈으로 겨우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머리카락보다 가는 틈이었다. 다른 이들은 아마 벽의 오래된 균열로 치부했거나, 아예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은율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손가락으로 균열을 따라 조심스럽게 쓸어보니, 벽지가 살짝 들떠 있었다. 마치 원래 벽이 아니었던 것처럼, 혹은 어떤 것을 숨기기 위해 덧붙여진 것처럼.
“김형사.”
은율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공간을 갈랐다.
“이 방은 벽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김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모든 잠금장치는 보이는 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잠금장치야말로 가장 견고한 법이죠. 강태준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은, 결코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은율은 손가락으로 그 미세한 균열을 톡톡 두드렸다. 그 순간,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첫 번째 실마리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