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43분. 현우는 익숙하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비빅, 삐비빅, 삑. 투박한 기계음이 침묵한 복도를 찢었다. 철컥,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지독한 피로가 그를 감쌌다. 텅 빈 아파트 내부의 공기는 어딘가 눅진했다. 마치 비라도 내릴 것처럼 습하고 무거웠다. 그가 현관에 구두를 벗어두고 거실로 향했다.
“하아…”
오늘도 지긋지긋한 야근이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워 소파에 몸을 던졌다. 허름한 스탠드 조명 아래서,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틱, 톡. 틱, 톡. 꼭 누군가 일부러 박자를 맞추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희미한 긁는 소리가 현우의 귀를 파고들었다. 마치 손톱으로 나무를 긁는 듯한, 짧고 날카로운 소리. 스르륵.
현우는 잠결에 인상을 찌푸렸다. 쥐라도 들어왔나? 그는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거실은 여전히 적막했고, 스탠드 조명은 무심히 빛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스르르륵… 긁는 소리는 이번에는 주방 쪽에서 들려왔다. 현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아파트에는 쥐가 나올 리 없었다. 신축 아파트인데다, 청소도 깨끗하게 하는 편이었다. 그는 뻣뻣한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제 먹고 남긴 과일 접시와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을 샅샅이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현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그는 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컵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가 컵을 내려놓으려는데, 컵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쨍그랑! 컵은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현우는 당황했다. 평소 같으면 손에서 미끄러질 리 없었다. 컵에 기름이라도 묻어 있었나? 그는 손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다. 멍하니 깨진 유리 조각들을 내려다보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쉬익…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우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텅 빈 거실. 하지만 분명, 누군가 옆에 서서 그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누구… 야?”
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거실 불을 켰다. 환하게 밝아진 실내. 공포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벽에 걸린 그림도, 소파 위의 쿠션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현우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는데, 벽장 문이 스르륵, 아주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녹슨 경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 그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현우는 수척한 얼굴로 출근 준비를 했다. 거실의 깨진 컵 조각들은 그대로였다. 그는 그것들을 치우지도 못하고 밤새 얼어붙어 있었다. 출근해서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간밤의 일들은 그저 피곤함이 만들어낸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래, 너무 피곤해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의 합리적인 생각은 산산조각 났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어제 분명히 닫아놓았던 벽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벽장 안의 옷가지들은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널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 벽장 안을 뒤집어엎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뭐야.”
현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벽장 안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잃어버린 물건도, 침입자의 흔적도. 그저 옷들이 헤집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집에 도둑이 들었거나, 아니면…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는 섬뜩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현우는 거실에 앉아 손에 땀을 쥐었다. 그가 설치한 휴대폰 카메라가 거실 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TV를 켜 두었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똑. 똑. 똑.
현우는 숨을 멈췄다. 소리는 바로 그의 눈앞, 벽에서 들려왔다. 마치 벽 너머에서 손가락으로 툭툭 치는 듯한 소리.
“누구…세요?”
그의 목소리는 아예 나오지 않았다. 목이 바짝 말랐다. 똑. 똑. 똑. 소리는 더 커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벽에서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촤자작, 촤자작. 마치 거미줄처럼 벽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의 아파트 벽에,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젠장!”
현우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TV 화면이 갑자기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뉴스 앵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노이즈와 함께 섬뜩한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펑! TV가 폭발하듯 꺼지면서 아파트 전체의 불이 나갔다.
암흑. 지독한 암흑.
현우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거려 손전등을 켰다. 불빛이 벽을 비추는 순간, 그는 얼어붙었다. 벽의 균열들은 이제 단순히 벽을 찢은 것이 아니었다. 그 균열 사이로 섬뜩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에메랄드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 사이로, 희미하게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물속처럼 일렁이는 공간. 현우는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 이게 대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강렬해지며 아파트 전체를 삼켰다. 강렬한 흡입력과 함께, 바닥에 놓여 있던 의자가 굉음과 함께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우는 비명을 질렀다. 그를 중심으로 모든 물건들이 공중에 떠올라 빛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를 붙잡고 잡아당기는 것처럼, 몸이 점점 빛을 향해 끌려갔다.
“아아아악!”
그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손가락 끝이 미끄러지고, 그의 몸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눈앞의 벽은 이제 거대한 소용돌이치는 포털이 되어 있었다.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현우는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격렬한 혼란을 느꼈다. 시야는 번개처럼 터져 나가는 색채로 가득했고, 귀에서는 모든 소리가 한데 섞여 거대한 울림으로 변했다.
그는 잠시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떴을 때, 현우는 더 이상 자신의 아파트에 있지 않았다. 머리 위로는 붉은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거대한 쌍둥이 달이 떠 있었고, 발아래는 낯선 식물들이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기는 짙은 풀내음과 함께, 알 수 없는 금속성 냄새를 풍겼다.
“여긴… 어디야?”
그의 눈앞에는, 방금 전 자신의 아파트 벽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이끼 낀 돌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돌기둥 표면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빛을 머금고 있었다.
현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파트에서 벌어졌던 그 기괴한 현상들은, 그저 이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기 위한 징조였을 뿐이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기대감과 함께, 새로운 세계의 막이 오르고 있음을 직감하는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는 아파트 벽이 사라진 자리, 이세계의 풍경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