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아파트 23층 지후의 거실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아니, 침묵이어야만 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 냉장고의 미약한 진동음, 창밖으로 멀리 들려오는 도시의 숨통 같은 소음까지, 모든 것이 평소보다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기이한 현상들은 지후의 신경을 실처럼 가늘게 찢어 놓았다.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았지만, 뇌리에는 어제 저녁 컵이 혼자 떨어져 깨졌던 잔상, 그저께 새벽 현관문이 삐걱이며 열렸던 끔찍한 기억들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려 애썼지만, 이미 심장은 규칙적인 박동을 잊은 지 오래였다.
“젠장… 불면증이라니.”
지후는 거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리모컨이 스르륵,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고작 1밀리미터도 안 되는 움직임이었지만, 그는 확신했다. 분명 움직였다.
“…또 시작이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반드시, 기필코 그 움직임의 원인을 밝혀낼 생각이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차가웠다. 마치 오랫동안 한기도는 곳에 방치되어 있던 것처럼.
그때였다. 벽 안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다. 드드득, 드드득. 마치 손톱으로 석고보드를 긁는 듯한, 섬뜩하고 불쾌한 소리였다. 지후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벽 쪽으로 다가갔다.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더욱 명확해졌다. 벽 속에 무언가 갇혀서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 애쓰는 것 같았다.
“거기 누구야?”
지후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긁는 소리만 계속될 뿐이었다. 그의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벽에 대자, 안쪽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
쾅!
그 순간, 주방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후는 화들짝 놀라 주방으로 달려갔다. 식탁 위에는 그가 몇 시간 전 물을 마시려 꺼내두었던 유리컵이 없었다. 대신, 바닥에는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들이 햇빛 한 줄기 없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내가 떨어뜨린 게 아니야.”
그는 분명히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단 한 번도 바닥에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깨지는 소리가 날 때 자신은 거실 벽 앞에 있었다.
등 뒤에서 섬뜩한 한기가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바로 뒤에 서서 차가운 숨을 내쉬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 지후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주방과 거실을 잇는 통로,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흔들리는 듯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공간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급히 거실등 스위치를 찾아 손을 뻗었다. 찰칵! 스위치를 올리자 거실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등 스위치를 만지지도 않았는데,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마치 누군가 그를 비웃는 것처럼, 아니, 가지고 노는 것처럼.
지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 빌어먹을 장난은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될 셈인가? 그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누구야! 대체 누구냐고!”
그의 목소리가 아파트 안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대답은 오지 않았다. 대신,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작은 서랍장에서 드르륵, 하고 서랍이 스스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후의 시선은 서랍장으로 향했다. 서랍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아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서랍이 반쯤 열린 채 그를 노려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 보고 싶어…
지후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한, 축축하고 불쾌한 속삭임이었다. 마치 그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듯한 섬뜩함이 전신을 마비시켰다. 그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두 발자국.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잉—
갑작스러운 강풍이 아파트 안에 휘몰아쳤다. 닫혀있던 모든 창문이 흔들리고, 거실의 커튼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쾅! 안방 문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그리고 순간, 아파트 전체가 암흑에 잠겼다. 거실등은 물론, 복도등, 주방등까지 모든 불이 동시에 꺼졌다. 완벽한 어둠이었다.
지후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더듬거려 휴대폰을 찾았다. 떨리는 손으로 플래시를 켰다. 빛이 닿는 곳은 희미한 어둠뿐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을 긁으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짐승이 발톱으로 바닥을 긁는 듯한, 끔찍하고 질척거리는 마찰음이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그가 방금까지 앉아있던 소파가 있던 자리였다.
지후는 플래시를 그쪽으로 향했다.
소파가, 거실 한가운데로 밀려나 있었다. 그가 앉아있던 그 푹신한 소파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의해 끌려온 것처럼, 원래 있던 벽 쪽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소파가 있던 자리, 벽면에 바짝 붙어있던 마룻바닥에는… 검붉은 얼룩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그것은 피였다.
아니, 정확히는 피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마치 붉은 물감을 쏟아놓은 듯한, 그러나 미묘하게 다른, 불쾌한 점성의 액체였다. 지후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때, 귀에 다시 속삭임이 들려왔다.
— 이제, 너도 우리와 함께…
속삭임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벽에서, 천장에서, 바닥에서, 심지어 그의 몸 안에서까지. 지후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플래시를 소파 쪽으로 돌렸다.
소파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플래시 불빛이 스치는 순간, 소파의 푹신한 등받이가 아주 미세하게, 아래로 푹 꺼지는 것을 지후는 분명히 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곳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지후는 깨달았다.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 아파트 안에, 자신 말고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찼다. 플래시가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며 소파와 바닥의 얼룩을 번갈아 비췄다.
쿵. 쿵. 쿵.
심장이 발악하듯 뛰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 머물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