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계의 그림자 수사록: 첫 번째 밀실
선율이 흐르는 듯한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스쳤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섬세한 잎맥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구현된 숲, 저 멀리 반짝이는 호수의 물결, 그리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흙과 풀의 향기까지. 이곳은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나’였다.
나는 ‘아르젠’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를 유랑하고 있었다. 직업은 명탐정. 물론 게임 시스템이 부여한 공식 직업은 아니었다. 그저 흥미와 취미로 온갖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다녔을 뿐인데, 어느새 게임 내에서 입소문이 자자해졌다. 내 주특기는 ‘밀실’.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공간에서 벌어진 범죄의 트릭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오늘도 한적한 숲길을 걷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길섶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 그러나 나의 본능은 언제나처럼 기묘한 전조를 감지하고 있었다. 이 완벽한 평화 속에는 언제나 잔혹한 이면이 숨어있기 마련이었다.
그때, 귓가에 다급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긴급 요청: 대저택 ‘그림자 관’에서 살인 사건 발생! 현재 현장은 봉쇄되었습니다. 상세 내용은 첨부된 좌표를 확인하십시오.]
나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올 것이 왔다. 평화는 역시 잠시간의 환상일 뿐이었다. 알림창에 뜬 좌표를 확인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을 벗어났다. ‘그림자 관’이라니,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다. 아마 고위 귀족이나 유력 상인의 저택일 터. 그런 곳에서 살인 사건이라. 그것도 ‘현장 봉쇄’라는 단서까지 붙은 걸 보면, 백이면 백, 밀실 살인이었다. 나의 무대가 열렸다.
***
그림자 관은 이름 그대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짙은 회색의 석조 건물은 웅장하면서도 어딘가 음침한 기운을 풍겼다. 대저택의 정문 앞에는 이미 수많은 유저들과 NPC 경비병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빗발쳤다.
“말도 안 돼! 가레스 경이 살해당했다고?”
“게다가 밀실 살인이라던데? 어떻게 이런 일이…!”
“저택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창문도 다 안에서 걸어 잠겨 있었다고 하던데?”
나는 경비병들의 제지를 뚫고 앞으로 나섰다. 내 게임 ID, ‘아르젠’을 본 경비병들이 잠시 수군거렸지만, 이내 길을 열어주었다. 나의 명성은 때때로 이런 식으로 힘을 발휘하곤 했다.
저택의 안뜰에 들어서자, 한 중년의 NPC 경비대장이 이마를 짚은 채 서성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한숨과 절망감이 가득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르젠 님, 이 어려운 사건에 직접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상황 설명을 듣고 싶군요. 가레스 경은 누구이며,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발견되었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감상적인 대화는 시간을 지체시킬 뿐이었다.
경비대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가레스 경은 이 지역 최고의 보석상입니다. 어젯밤, 서재에서 홀로 마지막 장부를 정리하겠다며 사람들을 모두 물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의 집사가 서재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어… 결국 문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발견 당시의 상황은?”
“가레스 경은 서재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습니다. 가슴에 깊은 칼자국이 있었고…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그리고…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모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창살도 단단히 박혀있어 밖에서 침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설명을 되짚었다. ‘안에서 잠긴 문’, ‘닫힌 창문’, ‘외부 침입 불가’. 전형적인 밀실이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한.
“서재로 안내해주시죠.”
경비대장의 안내를 받아 저택 내부로 들어섰다. 복도는 고풍스러운 카펫으로 깔려 있었고, 벽에는 값비싼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모든 것이 부유함과 품격을 말해주었지만, 지금은 그저 흉흉한 살인의 흔적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서재 앞에는 이미 몇 명의 유저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 있었다. 그들은 내게 눈길을 주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굳게 닫힌 서재 문은 마치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서재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벽을 가득 채운 책장, 앤티크한 가구들, 그리고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시체. 가레스 경이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고통보다는 놀라움이 더 진하게 배어 있었다. 가슴에 박힌 단검은 섬뜩할 정도로 빛났다.
나는 현장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의 시선은 마치 레이더처럼 모든 것을 훑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 흐트러진 책들, 창문 틈새로 비치는 희미한 햇빛, 심지어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먼지 하나까지도.
“현장을 발견한 집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경비대장이 서재 한쪽에서 넋을 잃고 앉아있는 노인을 가리켰다. “저쪽에…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노인에게 다가가 짧게 물었다. “가레스 경과 마지막으로 대화한 것은 언제입니까?”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서재에 계신다고 하셔서… 저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차를 한 잔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때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차를 드렸을 때, 서재 문은 어떻게 되어 있었습니까?”
“열려 있었습니다. 제가 드리고 나오면서 닫았고… 경비병이 문을 잠그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경비병이요…!” 노인이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옆에 서 있던 경비대장을 가리켰다. “아침에 저희가 문을 부술 때, 분명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
경비대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희가 부수고 들어갔을 때, 문은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저희는… 범인이 아직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서재 안에는 가레스 경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시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레스 경은 바닥에 엎드린 채 발견되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경비병들이 조심스럽게 시신을 바로 눕혀놓은 상태였다. 가슴에 박힌 단검은 한눈에 봐도 치명적이었다. 문제는 범인이 어떻게 사라졌느냐였다.
나는 서재의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창문은 두꺼운 나무 프레임으로 되어 있었고, 안쪽에는 튼튼한 빗장이 걸려 있었다. 빗장은 녹슬지도, 파손되지도 않은 채 굳게 닫혀 있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물론, 내부에서 빠져나간 흔적도 없었다. 창밖으로는 꽤 높은 절벽이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이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완벽한 밀실. 허술한 곳이 단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완벽함은 오히려 나의 흥미를 돋우었다.
그때, 내 발밑에 무언가 걸렸다.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정교하게 세공된 나사였다. 분명 어딘가에서 떨어진 것이리라.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나사가 떨어질 만한 곳은 어디였을까?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천장으로 향했다. 앤티크한 문양으로 장식된 거대한 천장. 그 가운데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샹들리에를 지탱하는 쇠사슬 중 하나가 미세하게 덜렁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육안으로는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나의 예민한 눈은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손안의 나사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샹들리에의 덜렁거리는 쇠사슬을 번갈아 응시했다. 무언가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경비대장은 내 옆에서 초조하게 서 있었다. “아르젠 님, 혹시… 단서라도 찾으셨습니까?”
나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밀실… 완벽해 보이지만, 완벽한 밀실은 존재하지 않지.”
나는 시선을 내리깔아 가레스 경의 시체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슴에 박힌 단검의 손잡이 부분에 미세한 흠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죽는 순간 무엇인가를 강하게 움켜쥐려 했던 듯, 굳게 쥐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놓쳤다는 듯한, 혹은 무언가를 잡으려 했던 듯한…
내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설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밀실 살인의 트릭은 언제나 상식을 비트는 데 있었다. 범인이 어떻게 이 완벽한 공간에서 사라졌을까? 그리고 가레스 경의 마지막 몸짓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서재의 모든 벽을 짚어보았다. 책장 뒤의 숨겨진 문? 아니, 그런 조작된 흔적은 없었다. 바닥이나 천장의 비밀 통로? 역시 그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다시 한번 샹들리에로 향했다. 그 작은 나사. 그리고 덜렁거리는 쇠사슬.
문득, 나는 가레스 경의 시체를 둘러싼 바닥에서 아주 희미한, 마치 액체가 마른 듯한 얼룩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피의 얼룩과는 달랐다. 투명에 가까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그것.
나는 무릎을 굽혀 얼룩을 자세히 살폈다. 그것은 액체가 스며들었다 마른 흔적이었다. 만약 이 얼룩이 살인과 관련이 있다면?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퍼즐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경비대장과 집사는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범인은 이 서재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경비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하지만… 범인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 범인은 이 안에 있었고… 여전히 이 안에 있습니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샹들리에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살짝 흐트러진, 어딘가에 걸려 있는 듯한 샹들리에의 쇠사슬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것은 밀실 살인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밀실 살인이었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의 밀실 살인은 아니었죠.”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혼란스럽게 샹들리에로 향했다. 아무도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범인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챕터 1.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