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삭막한 바람의 끝에서

하늘은 언제나처럼 회색빛이었다. 지평선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말라붙은 흙먼지를 몰아와 이안의 뺨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한때 웅장한 문명을 자랑했을 거대한 석탑의 잔해가 멀리 아스라이 보였지만, 이제는 그저 흉물스러운 그림자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 모든 영광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무의미했다. 오직 오늘 하루의 양식, 오늘 밤의 잠자리만이 절박한 현실이었다.

이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뱃속에서는 굶주림이 지독한 독사처럼 꿈틀거렸다. 사흘째였다. 변변한 식물 하나, 변이되지 않은 들짐승 한 마리조차 찾아보기 힘든 이 황폐한 대지에서,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이안은 아직 죽을 수 없었다. 그에겐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흐읍… 흐읍…”

메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이안은 돌무더기 사이를 헤쳐 나갔다. 지쳐 무거워진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온몸의 기운이 바닥난 듯했지만, 그의 의식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깨어 있었다. 굶주림은 때로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묘한 힘이 있었다. 미세한 기척, 멀리서 스치는 바람 소리, 땅속을 기어가는 작은 벌레의 진동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이안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흐릿하게 퍼져 있던 의식의 촉수가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흔적만 남은 영기(靈氣)의 조각들을 더듬어 나갔다. 선조들이 말했던 찬란한 영력의 시대는 까마득한 옛이야기일 뿐, 지금 이 세상에 남은 영기는 뿌리 뽑힌 잡초의 시든 줄기처럼 미약했다. 하지만 이 미약한 기운조차 귀한 시대였다. 그것은 종종 생명의 징표였으니까.

‘저쪽인가…?’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영기의 잔향이 느껴졌다. 바싹 마른 땅속 깊숙이, 아주 작은 생명의 덩어리가 숨 쉬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여행자의 심정처럼, 이안의 심장을 거세게 울렸다.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돌덩이에 걸려 휘청거렸지만, 굶주림이 준 집념은 그를 쓰러뜨리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낡아빠진 고목의 뿌리가 뒤엉킨 작은 언덕이었다. 뿌리 사이의 갈라진 틈새로 손바닥만 한 흙이 드러나 있었고, 그곳에선 아주 작은, 보랏빛을 띠는 풀 한 포기가 고고하게 피어나 있었다. ‘생명의 기원초’. 극히 드물게 황폐한 땅에서도 살아남아 영기를 머금는 약초였다. 하나만 먹어도 며칠은 버틸 수 있는 귀한 식량원이자 기운을 북돋아 주는 약재.

이안의 눈동자에 활기가 돌았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가 확 끼쳐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목 뒤편의 그림자 속에서 짐승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가느다란 몸통, 털 한 오라기 없이 윤기 나는 검은 피부, 그리고 거센 돌개바람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는 눈동자. ‘풍랑 늑대’였다. 재빠르고 교활하며, 무엇보다 굶주림에 미쳐버린 이 황무지의 사냥꾼. 녀석의 송곳니는 맹독이 흐르는 듯 검붉게 빛나고 있었다.

풍랑 늑대는 이안을 노려보았다.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의 만족감과 동시에, 자신의 구역에 침범한 자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듯했다. 녀석의 시선은 잠시 이안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이안의 손이 닿으려던 생명의 기원초로 향했다. 녀석 역시 그 약초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기원초를 움켜쥐었다. 뽑아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풍랑 늑대는 그 찰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녀석의 몸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이안의 눈앞에 번개처럼 다가왔다.

“젠장!”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피할 새도 없이 녀석의 발톱이 어깨를 스쳤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아픈 것보다 독이 퍼질까 두려웠다.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남아있던 미약한 영기를 손바닥에 모았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손바닥에서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 번의 기회!’

“하압!”

이안은 전력을 다해 기운을 응축하여 늑대를 향해 쏘아 보냈다. 푸른 영력 구체가 늑대에게 날아갔다. 풍랑 늑대는 놀랍도록 재빨랐다. 몸을 틀어 구체를 피하려 했지만, 이안의 영력은 정확히 녀석의 옆구리에 명중했다.

콰앙!

작은 폭발음과 함께 늑대의 옆구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녀석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굴렀다. 이안이 모은 영기는 고작해야 초급 수련자의 것에 불과했지만, 굶주림에 지쳐있던 늑대에겐 치명적이었다.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를 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이안은 숨을 헐떡였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한 번의 공격으로 영기를 거의 소진해 버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녀석이 정신을 차렸을 때 다시 공격당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듯했다. 멀어져 가는 돌개바람의 그림자처럼, 늑대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황급히 도망쳤다.

축 늘어진 팔에 들린 보랏빛 기원초가 보였다. 이안은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피가 흐르는 어깨는 욱신거렸다. 하지만 눈앞의 기원초는 그 모든 고통을 잊게 할 만큼 값진 것이었다.

“살았다…”

작게 중얼거렸다. 손에 들린 기원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흙과 약초 특유의 비릿한 맛이 뒤섞였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꿀꺽 삼키자마자 온몸에 미약하지만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며칠간 굶주렸던 세포들이 갈증을 해소하듯 기운을 흡수했다.

정신이 조금 맑아지자, 이안은 어깨의 상처를 확인했다. 깊지는 않았지만, 늑대의 발톱에 독기가 묻어 있었는지 상처 주위가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칼을 꺼내 독이 퍼진 살점을 도려냈다.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생존을 위한 일이었다.

기원초를 절반쯤 먹었을까.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바닥났던 기운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이안은 남은 기원초를 고이 품속에 넣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미약한 힘으로는 이 황폐한 세상에서 버틸 수 없다. 더 강해져야 한다.

이안은 멀리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회색 하늘을 뚫고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 노을 아래로, 마치 세상의 끝을 알리는 듯한 거대한 균열의 그림자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다. 과거 영웅들이 봉인했다던 마물의 땅, 금지된 장소 ‘멸망의 틈’이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이 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이안은 그 틈을 등지고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기필코…”

목표는 아직 아득하고, 갈 길은 멀었다. 하지만 생명의 기원초가 준 작은 희망은 이안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불씨를 지폈다. 삭막한 바람이 또다시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그 바람 속에서, 이안은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오늘 밤도, 그리고 내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