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균열 (龜裂)

남궁 태준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아무리 최고급 실크라지만 목을 조여 오는 감각은 여전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감은 단순한 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며칠째, 아니 정확히는 보름 전부터 시작된 불쾌한 이질감.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한 낯선 균열이었다.

“젠장.”

낮게 욕을 읊조리며 그는 창밖을 응시했다. 빌딩 숲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남산타워가 보였다. 서울의 야경은 언제나 그의 성공을 상징하는 듯 빛났지만, 오늘따라 모든 불빛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사소한 것들에서 시작됐다. 운전기사가 바뀐 지 두 달 만에 세 번이나 접촉사고를 냈다. 그것도 매번 같은 지점에서, 어처구니없이. 그토록 철저하게 관리하던 내부 정보가 새어나가 경쟁사에게 선수를 빼앗기기도 했다. 심지어 아침 식탁에 오르던 최고급 원두커피는 쓴맛이 강해져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미뢰가 변한 것인가 싶어 바리스타까지 불렀으나, 바리스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회장님, 원두는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더 숙성이 잘 돼서 깊은 향이 나는데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오늘 오전, 해외 투자 유치를 위한 중요 프레젠테이션 자리. 그는 완벽을 위해 밤샘 준비까지 마쳤다. 연습한 대로 술술 풀려야 할 발표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슬라이드는 제때 넘어가지 않았고, 준비된 영상은 오류를 뿜어냈다. 급기야는 프레젠테이션 말미에 단상이 갑자기 꺼지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순간 투자자들의 비웃음 섞인 표정과 웅성거림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수십 년간 쌓아온 그의 명성에 흠집이 가는 소리였다.

“누구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미는 거야?”

태준은 이를 갈았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규칙적인 불행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주변을 조금씩 갉아먹는 느낌. 이 모든 일이 시작된 보름 전, 그는 홀로 밤거리를 걷다가 알 수 없는 서늘한 시선을 느꼈었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그의 완벽한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비서. 지금 당장 조사해. 최근 내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이상한 일들을. 작은 사고 하나, 계약 실패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보고해. 그리고… 혹시 모르니 심령 전문가든, 퇴마사든, 뭐든 불러. 이 불길한 기운, 도려내야겠어.”

그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분노와 함께 미약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남궁 태준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내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

강민은 컴컴한 옥탑방에서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화면 속에는 남궁 태준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 잡혀 있었다. 초조함에 일그러진 얼굴, 동요하는 눈빛. 완벽하다고 자부하던 가면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과정이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제 겨우 시작이야, 태준아.”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내 사그라졌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실타래처럼, 태준의 삶을 옥죄는 작은 마법이었다.

강민은 차가운 창밖을 내다봤다. 태준이 서 있는 빌딩의 불빛은 여전히 휘황찬란했지만, 그를 둘러싼 기운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민이 보름 전, 한강 변에서 작은 돌멩이에 새겨 넣었던 ‘균열’의 문양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미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흐르고 있었고, 강민은 그 힘을 다룰 줄 아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친구에게 배신당해 모든 것을 잃었던 날, 강민은 맹세했다. 똑같이 돌려주겠다고. 하지만 직접적인 파멸은 너무 빠르고 고통이 적을 것이었다. 그는 태준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서서히, 미세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길 원했다. 가장 사소한 것부터 가장 중요한 것까지, 태준이 통제할 수 없는 불행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강민은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낡은 옥탑방의 침묵 속에서, 쿵, 쿵, 쿵, 그의 심장이 차갑게 울렸다. 5년 전, 태준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의 미래, 그의 명예, 심지어 그의 사랑까지. 그날의 아픔은 아직도 뼈에 사무쳤다. 이제 그 빚을 받아낼 차례였다.

강민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검게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조각과 바싹 마른 새의 발톱, 그리고 흙먼지가 잔뜩 묻은 낡은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강민과 태준이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는 그 모든 웃음이 진심이라고 믿었다.

“너무… 쉬었지.”

강민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나뭇가지 조각을 집어 들고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다음 단계가 필요한 때였다. 단순한 불운을 넘어서, 태준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건드려야 할 때.

‘이 비서. 심령 전문가든, 퇴마사든, 뭐든 불러.’

태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렸다. 피식, 강민은 비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눈치챈 건가. 너무 늦었다, 태준아. 그 어떤 전문가도, 그 어떤 퇴마사도, 내가 엮어놓은 인연의 끈은 풀지 못할 것이다.

그는 상자 속 사진을 다시 꺼냈다. 태준의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피식 웃었다.

“가장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고통이 어떤 건지, 이제야 조금 알겠어?”

강민은 나뭇가지 조각을 쥐고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태준의 얼굴과 그에게 얽힌 복잡한 기운의 흐름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미세하게 조작했던 균열은 이제 더 크고, 깊은 파멸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그의 계획은 이제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다. 태준이 가진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태준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가장 굳건하다고 믿는 것을 부술 차례였다.

어둠 속에서 강민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일은 네가 가장 아끼는 그 ‘신뢰’가, 네 발밑에서 무너져 내릴 거야.”

그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더욱 강하게 일렁였다. 낡은 옥탑방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본격적인 지옥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