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먼지가 폐부를 긁었다.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곡괭이를 휘둘렀다. 쾅, 쾅! 단단한 암반이 울음을 토해내며 잘게 부서져 내렸다. 그의 등 뒤에서는 수십 명의 광부들이 똑같은 리듬으로 절망의 합창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철혈 제국의 심장부에 숨겨진, 이름 없는 광산촌이었다. 아니, 감옥이었다.
“류진! 어서 서둘러! 오늘의 할당량을 못 채우면 아는 거 있지?”
등 뒤에서 채찍 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다. 제국 병사, 아니, 감시병의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그들의 헬멧 위로 번쩍이는 철혈 제국의 문양은 이 땅의 모든 평민에게 공포와 굴종을 강요했다. 류진은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묵묵히 곡괭이를 내리쳤다. 지난달, 그의 동생은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날 밤, 동생은 열병에 시달리다 결국 숨을 거두었다.
* * *
해 질 녘, 지친 몸을 이끌고 류진은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광산촌의 모든 집은 먼지로 뒤덮여 잿빛이었다. 하늘마저도 제국처럼 차가운 강철색이었다. 오두막 문을 열자 쿰쿰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그를 맞았다. 벽에는 낡은 삽 하나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 광산에서 제국의 강압적인 노역에 시달리다 결국 병들어 돌아가셨다. 그 전에는 어머니가, 그리고 이제는 동생마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류진의 가슴속에서 작은 불꽃이 일렁였다. 그것은 분노였고, 절망이었으며, 동시에 어렴풋한 희망의 씨앗이었다.
그날 밤, 류진은 몰래 광산촌을 빠져나왔다. 오래전부터 은밀히 소문으로만 떠돌던 ‘바람 계곡’으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소문에 따르면 그곳에는 제국의 폭정에 맞서는 자들이 모여 있다고 했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류진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며칠 밤낮을 헤매다 그는 마침내 깊은 숲 속, 바위투성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협곡에 다다랐다. 절벽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기이하게 울렸다. 그때였다. 숲 그림자 속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류진은 순간 몸을 움찔했다. 어둠 속에서 거친 차림의 남녀 두 명이 나타났다. 한 명은 낡은 가죽 갑옷을 입고 단검을 든 여자였고, 다른 한 명은 키가 크고 덩치 큰 남자였다. 남자는 류진의 어깨에 거대한 철퇴를 들이밀었다.
“광산촌에서 온 류진이라고 합니다. 아셀 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셀은 어디에도 없다. 네놈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왔지?”
류진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제국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제국에 맞서는 자들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부디,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여자는 류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시선은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깊은 슬픔을 담고 있는 듯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아셀이다. 일어나라.”
류진은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아셀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곳은 바람 계곡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름 없는 자들이다. 제국의 눈에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먼지나 다름없지. 하지만 먼지도 모이면 태산을 가릴 수 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류진?”
류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저처럼 가족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알던 광산촌의 아이들이, 더 이상 배고픔에 울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국의 폭정 아래 신음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아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좋다. 환영한다, 류진. 이 철혈 제국의 심장에 작은 균열을 내러 온 것을.”
* * *
바람 계곡의 은신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었다. 낡은 천막들이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었지만, 그 안에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류진은 그곳에서 카일이라는 젊은 전사를 만났다. 카일은 혈기 왕성하고 다혈질이었지만, 뛰어난 전투 실력과 불타는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시 빈민가에서 제국 병사들에게 여동생을 잃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흐음, 광부라. 제국 놈들이 제일 좋아하는 재료지.” 카일은 류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꼬듯이 말했다.
“그래서 더욱 이들과 싸워야 하는 거 아니겠나.” 류진은 차분하게 받아쳤다.
카일은 픽 웃었다. “말솜씨는 나쁘지 않군. 어차피 같은 배를 탔으니 잘해보자고.”
아셀은 그날 저녁 모두를 모아놓고 첫 번째 작전을 발표했다.
“철혈 제국은 다음 주, 수도 아르제니아로 향하는 대규모 보급 마차 행렬을 보낼 것이다. 그 마차에는 제국의 귀족들을 위한 사치품과 병사들을 위한 무기, 그리고 각지에서 약탈한 식량이 실려 있을 것이다.”
모두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규모 보급 마차는 제국에게 있어서 동맥과 같았다. 그것을 건드리는 것은 곧 제국의 심장을 직접 노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무모한 짓이 아닙니까, 아셀 님?” 한 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의 병력으로는…”
아셀은 단호하게 말했다. “알고 있다.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움직일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마차를 약탈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평민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필 것이다.”
그녀는 탁자 위에 펼쳐진 낡은 양피지 지도를 가리켰다. “마차 행렬은 ‘고룡의 목’이라 불리는 좁은 협곡을 지나갈 것이다. 그곳은 제국의 병사들이 방심하기 가장 좋은 곳이다.”
류진은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광산에서 오랜 시간 일했던 경험 덕분에 그는 지형을 읽는 데 익숙했다. “고룡의 목… 양쪽이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쪽은 급류가 흐르는 강입니다. 매복에는 유리하지만, 퇴로가 좋지 않습니다.”
아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하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제국은 다시 드넓은 평원에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것이다. 우리는 고룡의 목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녀는 류진을 바라보았다. “류진, 자네의 광산 경험이 도움이 될 때가 왔다. 고룡의 목 일대의 지반 상태를 파악하고, 마차의 통행을 방해할 함정을 설치할 수 있겠나?”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광맥을 찾던 기술로 지반의 약한 곳을 찾아내 무너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은 우리가 만들어낼 것이다.” 카일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제국 놈들이 감히 우리의 땅에서 마음껏 활개 치게 두지 않을 테다.”
* * *
작전 D-Day. 새벽의 안개가 고룡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류진은 며칠 밤낮으로 준비한 함정들의 최종 점검을 마쳤다. 협곡 입구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불안하게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얕게 파인 구덩이들이 나뭇가지와 흙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그의 손은 흙투성이였지만, 심장은 끓어오르고 있었다.
카일은 그의 옆에서 날카로운 검을 갈고 있었다. “긴장되냐, 광부?”
“아니. 오히려 차분하다.” 류진은 대답했다.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으니.”
“하! 나도 마찬가지다.” 카일은 씨익 웃었다. “제국 놈들의 피로 오늘 밤을 붉게 물들여주마.”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보급 마차들이 웅장한 제국 기병대의 호위 아래 협곡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흉갑 위로 태양 빛이 반사되어 번쩍였다.
“놈들이 온다! 모두 준비!” 아셀의 목소리가 협곡에 울려 퍼졌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마차가 류진이 설치해 둔 첫 번째 함정에 걸려들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마차의 바퀴가 부서지며 수레가 기울었다. 혼란에 빠진 제국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순간, 아셀의 신호와 함께 절벽 위에서 거대한 바위들이 굴러떨어졌다.
“무너뜨려라!” 류진은 온 힘을 다해 도르래를 당겼다. ‘우르릉!’ 절벽의 약한 지반이 무너지며 더 많은 바위와 흙더미가 마차 행렬의 중간을 가로막았다. 행렬은 순식간에 두 동강 났다.
“돌격!” 카일이 포효하며 은신처에서 뛰쳐나왔다. 뒤이어 수십 명의 반란군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제국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전투는 혼란스러웠다. 제국 병사들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무장도 훨씬 뛰어났지만, 좁은 협곡과 예측 불가능한 매복 공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류진은 곡괭이를 휘둘러 병사들의 방패를 부수고, 빈틈을 노려 공격했다. 그의 몸은 광산에서 단련된 강철 같았다.
카일은 분노에 찬 괴성을 지르며 적진을 휘저었다. 그의 검은 춤을 추듯 날카롭게 제국 병사들을 베어냈다. 아셀은 후방에서 지휘하며 활과 화살로 적들을 교란하고, 중요한 순간에 핵심 병력을 쓰러뜨렸다.
“젠장, 광부 놈들이 감히!” 한 제국 장교가 소리치며 류진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칼이 번뜩이며 류진의 어깨를 스쳤다. 아찔한 순간, 류진은 몸을 틀어 장교의 다리를 걸었고, 장교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 곡괭이 자루로 그의 턱을 강타했다. 장교는 맥없이 쓰러졌다.
수세에 몰리던 제국 병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히 평민들의 반격에 이렇게까지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마지막 병사가 협곡 밖으로 도망치는 순간, 반란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 * *
전투가 끝나고, 피로 물든 협곡에는 승리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류진은 지친 몸으로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은 피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카일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냈군, 광부. 제국 놈들이 꽁무니를 빼는 걸 다 보는 날이 오다니.”
아셀은 노획한 마차들을 확인했다. 기대했던 대로, 마차 안에는 수도 아르제니아의 귀족들을 위한 비단옷, 보석, 고급 와인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한 구석에는, 광산촌으로 가야 할 식량과 의약품이 소량 실려 있었다. 제국은 평민들의 필수품마저도 귀족들의 사치품과 한데 섞어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셀은 모인 반란군들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철혈 제국이 무적의 존재가 아님을 증명했다. 우리는 그들의 강철 같은 벽에 작은 균열을 냈다. 이 균열은 언젠가 거대한 틈이 되어 그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녀는 노획한 식량과 의약품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이다. 우리의 동족에게, 우리의 아이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바람 계곡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국에 대한 불만이 곪아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고룡의 목 전투는 불씨가 되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류진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제국의 수도 아르제니아가 있었다.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제국은 분명히 더욱 강력한 병력을 동원해 이 반란을 진압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류진의 가슴속에는 이제 더 이상 절망의 그림자가 없었다. 대신, 작지만 뜨거운 희망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동생과 부모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이자, 모든 이름 없는 자들을 위한 새로운 새벽을 향한 행진의 시작이었다.
“시스템 메시지: [자유의 불꽃] 연대기의 첫 번째 장이 열렸습니다. 당신의 선택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류진은 씨익 웃었다. 이제는, 싸울 때였다. 온몸으로 제국에 맞서,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