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미명(微明) 속 그림자
김민준은 익숙한 도시의 밤 풍경을 올려다보았다. 겹겹이 쌓인 아파트 건물들은 각자의 빛을 뿜어내며 어둠 속에 거대한 미로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중 17층, 그의 작은 보금자리에도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퇴근길, 지친 몸을 이끌고 붐비는 지하철에서 벗어나 겨우 현관문에 섰을 때였다.
삐빅, 삑삑.
비밀번호를 누르자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경쾌한 전자음이 들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늦여름이라지만 에어컨을 켜놓지도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한기가 돌았다.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신발을 벗었다. 언제나 그랬듯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는 그의 피곤을 약간이나마 덜어주는 듯했다.
넥타이를 풀고 재킷을 의자에 걸쳐 놓았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탄산수를 꺼내 마시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TV를 켰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깜빡이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적 속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딸깍.”
아주 작고 희미한 소리였다. 마치 손톱으로 유리잔을 건드린 듯한, 짧은 마찰음. 민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분명 집 안에 자신 혼자인데. 창밖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나 싶어 어깨를 으쓱였다.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섰다. 몸은 나른했지만, 잠은 선뜻 오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SNS를 스크롤 하다가 다시 그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명확하게.
“……끼이이익.”
작은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 민준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실 문은 닫혀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거실? 아니면… 주방?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크게 울렸다. 그제야 아까 현관문을 열었을 때 느꼈던 한기가 다시 떠올랐다. 단순히 피곤해서일까, 아니면…
“설마, 누가 들어왔나?”
아니, 그럴 리가. 비밀번호도 바꿨고,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저편, 주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분명 전등을 켜지 않았는데.
“…….”
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다가갔다. 불빛은 냉장고 문 틈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냉장고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듯, 아주 살짝 열려 있었다.
“내가 안 닫았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탄산수를 꺼내고 문을 닫았었다. 습관처럼 확인까지 했었다. 그런데 왜 열려 있지?
민준은 천천히 냉장고 문을 완전히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묵직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틈새로 새어 나오던 불빛도 사라졌다. 안심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등 뒤에서 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릇 깨지는 소리.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민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들이켰다.
싱크대 옆 식기 건조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유리컵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 누가 건드린 것도 아닌데. 바람도 없는데.
“이게… 뭐야?”
민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더 이상 피곤해서 헛것을 듣거나, 건물이 오래돼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명백히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움직인 흔적이었다.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마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
민준은 급히 거실로 돌아와 모든 전등을 켰다. 환하게 밝혀진 공간은 조금의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들은 여전히 현실의 기괴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청소 도구를 가져와 유리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파편 하나하나를 치울 때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을 죄어왔다.
겨우 모든 조각을 치우고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다시 소파에 앉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방금 전의 사건으로 가득 찼다. 이사 온 지 반년.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아파트는 조용하고 쾌적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때였다. 거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가 기우뚱, 하고 움직였다. 민준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액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다. 못에 제대로 걸리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그는 분명히 어제까지도 액자가 멀쩡히 걸려 있었음을 기억했다.
“장난하는 건가….”
누구지? 이런 종류의 장난을 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친구들? 하지만 다들 비밀번호를 모르고, 이렇게 새벽에 몰래 들어와 장난을 칠 정도로 짓궂은 친구도 없었다.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액자에 다가갔다. 손을 뻗어 바로잡으려는 순간, 그림 액자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 대신 아크릴로 된 전면이 충격에 의해 깨지지는 않았지만, 액자 모서리가 찌그러졌다. 민준은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손을 대기도 전에.
“제발….”
그는 거의 울부짖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려움이 온몸을 지배했다.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집에, 자신 외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그때였다. 거실 중앙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그의 스마트폰이 툭, 하고 움직이더니 그대로 화면이 켜졌다.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 화면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새파란 배경화면만 깜빡일 뿐.
민준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스마트폰의 화면이 깜빡이더니, 손가락으로 문자를 입력하는 듯한 움직임이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키패드를 두드리는 것처럼.
‘ㄱ’
‘ㅜ’
‘ㄷ’
‘ㅗ’
‘ㄱ’
그리고 마지막 글자가 입력되는 순간, 화면은 정지했다.
화면에 또렷이 박힌 다섯 글자.
“…구독?”
민준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였다. 공포에 질려 있는데, 난데없이 ‘구독’이라니. 그 순간, 스마트폰 화면이 갑자기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섬뜩한 속도로 하얀 글자들이 겹쳐졌다.
**’넌 이미… 내 구독자야.’**
새까만 화면 속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문장. 민준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냉기가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서 거실 전등이 깜빡이더니, 기이한 소리를 내며 완전히 꺼졌다.
암흑.
모든 빛이 사라진 공간에서, 민준은 자신을 짓누르는 절대적인 어둠과, 그리고 어둠 속에 숨 쉬고 있을 미지의 존재를 직감했다. 무언가, 아니 누군가가 바로 자신의 곁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거기… 누구 있어요?”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의 심장 소리만큼이나 크게 울리는 차가운 침묵만이 그를 덮쳐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마치 찢어진 비단 자락처럼 스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끼이이이익… 끼이이이익…
아파트의 모든 문들이 일제히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도망갈 곳은 없었다. 이 아파트는, 이미 자신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무언가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