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심장이 멎은 지 오래인 폐허, 낡은 강철 구조물들이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잿빛 하늘 아래,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망령’. 내 기체의 이름이었다. 녹슬고 닳아빠졌지만, 내 피와 땀, 그리고 오직 한 가지 목적만으로 다시 태어난 철혈의 투사. 망령의 조종석에 앉아 나는 차가운 계기판 불빛에 비친 내 얼굴을 응시했다. 야윈 뺨, 깊어진 눈가의 주름, 그리고 지옥불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
“강우… 드디어 찾았다.”
내 목소리는 메마른 사막의 바람처럼 갈라졌다. 수 년간, 이 폐허를 유령처럼 헤매며 내가 찾아 헤맨 것은 오직 한 사람, 아니, 한 괴물이었다. 한때는 형제보다 더 가까웠던 내 가장 친한 친구, 강우. 그리고 그가 훔쳐 달아난 우리의 꿈, ‘폭풍’.
그날의 기억은 언제나 선명했다. 우리는 낡은 공방에서 밤샘 작업을 밥 먹듯 했다. 기름때 묻은 손으로 설계도를 펼쳐 들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깎고 다듬으며 ‘폭풍’을 만들었다. 우리의 기술력, 우리의 열정,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최강의 메카. 세상의 모든 불의에 맞설 우리의 정의였다. 강우는 힘을, 나는 지혜를 담당했다. 그 녀석의 거친 돌파력과 나의 섬세한 제어 기술이 합쳐지면, 그 어떤 적도 두렵지 않았다.
“지훈아, 우리가 이 폭풍만 완성하면….” 강우는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에는 순수한 열망이 가득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완성 직전, 마지막 테스트를 위해 폭풍에 올랐던 날. 격납고 문이 열리고, 그 녀석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폭풍의 주 시스템이 강우의 전용 코드로 잠겼다. 비상 탈출 시스템마저 무력화되었다. 폭풍의 거대한 손이 나를 움켜쥐었다.
“미안하다, 지훈아. 이건 내 거다. 너에게는 과분해.”
그의 차갑고도 단호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박혔다. 배신감보다 더 깊은, 생의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는 듯한 공허함이 나를 덮쳤다. 폭풍은 나를 내팽개쳤다. 거대한 메카가 일으킨 바람이 내 몸을 날려버렸고, 나는 부서진 잔해들 속에 버려졌다. 뼈가 부러지고 피가 솟구쳤지만, 가장 아팠던 것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그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폭풍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채.
나는 죽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고, 남은 부품과 고철들을 모아 이 망령을 만들었다. 폭풍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 망령은 이제 강우를 찾고, 그 녀석에게 내 복수를 가져다줄 유일한 수단이었다.
망령의 레이더가 붉은 점을 포착했다. 거대한 에너지 시그널. 틀림없었다. 저 멀리, 한때 번성했던 고층 빌딩 숲의 잔해 사이로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색 장갑의 메카가 보였다. 폭풍. 우리의 꿈이자, 이제는 나의 악몽이 된 존재. 그 녀석은 여전히 건재했고, 아마도 이 폐허 속에서 약한 자들을 유린하며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었겠지.
망령은 그림자처럼 움직여 폐건물 뒤에 숨었다. 나는 폭풍의 동선을 예측했다. 강우는 언제나 대담하고 직선적인 움직임을 선호했다. 그 녀석은 분명, 이 메인 광장으로 진입할 터였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이 웅장한 엔진음을 울리며 광장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은 완벽했다. 폭풍의 장갑은 티끌 하나 없이 빛났고, 그 육중한 존재감은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했다.
“강우!”
망령은 숨어 있던 그림자에서 뛰쳐나왔다. 내 기체는 폭풍에 비하면 왜소했지만,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달려들었다. 강우는 망령의 출현에 잠시 멈칫하는 듯했다. 이내 그의 조종석 창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비웃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흥, 이 허름한 고철 덩어리는 뭐지? 감히 내 앞에 나타나다니.]
음성 변조된 강우의 목소리가 통신 채널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 녀석은 아직 내가 지훈인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 심장이 분노로 폭발할 것 같았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나, 강우! 네가 버리고 간 쓰레기 속에서 기어 나온 망령이다!”
[지훈…?! 네가 어떻게 살아있지?! 그날 분명히…!]
강우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냉소를 되찾았다.
[겨우 저런 고물이나 주워서 기어 나온 주제에… 하긴, 네 한계는 거기까지였으니까. 약한 놈은 도태되는 법이지. 네가 없어져서 폭풍이 얼마나 더 완벽해졌는지 아느냐?]
그 말에 내 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약한 놈?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나에게 하는 말이 고작 그것뿐인가?
“닥쳐라! 네 손으로 짓밟은 꿈을 내가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 짓밟힌 꿈이, 너의 목을 조를 것이다!”
망령은 검을 뽑아 들었다. 고철들을 녹여 만든, 날카롭지만 거친 날을 가진 검이었다. 폭풍은 팔뚝에 내장된 고에너지 캐논을 나에게 겨눴다.
[가소롭군. 저런 고철 검으로 폭풍을 상대하겠다고? 네 어리석음은 여전하구나!]
강우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푸른색 에너지 빔이 섬광처럼 뿜어져 나와 망령을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망령의 회피 기동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몸을 뒤틀어 간신히 빔을 피했지만, 폭풍의 거대한 발이 이미 내 코앞에 와 있었다.
쿵!
폭풍의 발이 지면을 내리찍었고, 망령은 충격파에 휘청이며 옆으로 날아갔다. 강우는 힘으로 나를 압도하려 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나는 망령의 시스템을 확인했다.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폭풍과 망령의 성능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폭풍을 만들었다. 폭풍의 모든 메커니즘, 약점, 강우의 전투 습관까지,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덤벼라, 강우! 내가 너를 빚어낸 것처럼, 내가 너를 부술 것이다!”
망령은 자세를 가다듬고 폭풍을 향해 돌진했다. 폭풍은 거대한 펀치를 날렸다. 묵직하고 강력한 일격. 나는 망령의 검을 방패 삼아 펀치를 받아냈다. 금속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망령의 팔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폭풍의 팔이 완전히 뻗어나와 회수되기 직전, 나는 망령의 다리에 모든 출력을 쏟아부어 폭풍의 복부로 파고들었다. 폭풍의 코어 부근에는 우리가 설계했던 비상 전력 공급 장치가 있었다. 외부에 노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특정 각도에서 강한 충격을 받으면 보호막이 일시적으로 불안정해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직접 설계했으니까.
강우는 당황한 듯 폭풍의 팔을 회수하며 나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사각지대로 파고든 뒤였다. 망령의 검이 회색빛 섬광을 그리며 폭풍의 복부를 긁어냈다. 보호막이 요동쳤고, 잠시나마 코어의 푸른빛이 희미해졌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강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는 내가 폭풍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폭풍의 모든 무기가 나를 향해 불을 뿜으려 했지만, 나는 망령의 회피 기동과 기체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폭풍의 공격 패턴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폭풍은 팔꿈치에서 칼날을 튀어나오게 하여 망령을 베어내려 했다. 나는 망령의 팔로 칼날을 막아내며 검을 휘둘렀다. 쩌저적! 폭풍의 어깨 장갑에 깊은 금이 갔다. 강우는 더욱 거칠게 폭풍을 조종하며 나를 밀어붙였다.
[흥, 이런 꼼수로 나를 이길 줄 아느냐! 폭풍은 네 고철 덩어리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강우는 폭풍의 전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폭풍의 모든 무기 포트가 열리고, 압도적인 에너지 파동이 망령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강우! 네가 그걸 쓸 때, 가장 취약해진다는 것을 잊었나!”
나는 소리쳤다. 폭풍이 모든 전력을 집중하면, 그 순간 방어막의 전면 밀도가 일시적으로 저하된다. 우리가 함께 설계할 때, 내가 고의로 만든 작은 맹점이었다. 혹시 모를 비상 상황을 대비한, 자폭 코드와 유사한 기능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망령은 모든 추진력을 끌어모아 폭풍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붉은 섬광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충격파가 온몸을 강타했다. 망령의 팔다리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장갑이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강우의 얼굴, 그 배신자의 미소가 나의 망막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박혀 있었다.
쾅!
망령은 폭풍의 복부, 내가 정확히 노렸던 지점에 박혔다. 내가 가진 마지막 모든 힘을 실어 검을 찔러 넣었다. 철판이 찢어지고, 회로가 끊어지는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폭풍의 푸른빛 코어가 일시적으로 암전 되는 것이 계기판에 표시되었다.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지훈, 네가… 네가 감히!]
강우의 목소리가 통신 채널을 통해 울부짖었다. 폭풍의 모든 무기 시스템이 오작동을 일으키며 무작위로 에너지 빔을 뿜어냈다. 나는 망령의 팔을 뒤틀어 검을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폭풍의 장갑이 산산조각 나고, 내부 회로가 비명을 지르며 찢어지는 소리가 온 폐허에 울려 퍼졌다.
망령은 피를 토하듯 검을 뽑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폭풍의 코어에서는 불꽃이 솟아오르고, 거대한 메카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연상시키듯, 폭풍은 느릿하게 한쪽 무릎을 꿇더니, 이내 거대한 굉음을 내며 지면으로 고꾸라졌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폐허를 뒤덮었다.
먼지가 걷히자, 폭풍의 잔해가 드러났다. 내가 만들었던 그 완벽했던 기체는 이제 끔찍하게 일그러진 고철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망령을 천천히 조종하여 폭풍의 조종석 해치로 다가갔다. 해치는 파손되어 있었고, 안에는 피투성이가 된 강우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조종복은 찢겨 있었고, 얼굴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망령의 팔로 강우를 조종석에서 끌어냈다. 그 녀석은 고통에 신음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절망, 그리고 미처 다 가시지 않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고철 덩어리로 나를… 폭풍을 이길 수 있었지?”
강우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나는 망령의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내 뺨을 스쳤다.
“네가 잊었나? 그 폭풍을 만든 건, 너와 나, 둘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네가 모르는 나의 비밀이 있었지. 네가 내 모든 것을 훔쳐 갔을 때, 그 비밀마저 훔쳐 갔어야 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때는 존경과 우정으로 빛나던 눈동자였지만, 이제는 오직 나약한 패배자의 그림자만이 비쳐 보였다.
“대체 왜… 왜 그랬어야 했나, 강우? 우리의 꿈이었잖아. 우리의 모든 것이었잖아.”
내 목소리는 떨렸다. 분노가 가라앉자, 걷잡을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강우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초라했지만, 여전히 비열함이 서려 있었다.
“꿈? 허황된 꿈이지. 네 이상은 너무 나약했어, 지훈. 나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로! 너처럼 미적거리는 이상주의자로는 절대 이룰 수 없었어!”
“그래서 나를 버렸다고?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죽어도 상관없었다는 건가!”
나는 강우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몸은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래… 네가 없어야 폭풍은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었지… 나만의 것이… 그리고… 결과는… 네가 이겼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 절대…”
강우는 마지막 말을 겨우 내뱉고는, 눈을 감았다. 그의 숨소리가 끊겼다.
나는 강우의 몸을 놓았다. 그의 시신은 차가운 폐허 바닥에 뒹굴었다. 나는 폭풍의 잔해를, 그리고 망령의 부서진 팔다리를 번갈아 보았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그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어떤 통쾌함도, 해방감도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공허함만이 나를 짓눌렀다.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강우도, 내가 그토록 아꼈던 폭풍도, 이제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 나의 오랜 친구도, 나의 꿈도, 결국 파괴되었다.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망가진 메카, 부서진 희망, 그리고 이 끝없는 고독감뿐이었다.
나는 망령의 조종석으로 다시 올라탔다. 고장 난 시스템들이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이 낡은 기체 역시 얼마 못 가 멈춰버릴 것이다. 나는 망연히 폐허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차갑게 가라앉는 풍경은, 마치 나의 심장과도 같았다. 뜨거운 분노는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재로 변해버린 차가운 심장뿐이었다.
복수는 끝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길을 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