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각의 심연
## 1. 고독의 메아리
고요.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태초이자 종말을 품은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이었다. 아르테미스 호는 그 침묵의 바다를 가르고 유영하고 있었다. 인류가 명명한 모든 별자리를 뒤로한 채, 아직 이름조차 붙지 않은 어둠 속으로, 미지의 심연을 향해.
함장 서민준은 사령실의 투명한 막 너머로 펼쳐진 무한을 응시했다. 은하수와는 거리가 먼, 희미한 먼지 구름과 드문드문 박힌 옅은 별빛만이 존재하는 황량한 우주였다. 3년째, 그는 이 강철 고래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이 비좁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인류의 호기심이 여기까지 닿았고, 그 호기심의 첨단에 자신이 있었다는 자부심도, 때로는 압도적인 고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곤 했다.
“함장님, 정기 보고 시간입니다.”
조용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민준은 현실로 돌아왔다. 조종 담당관 김도연이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언제나 미묘한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차트를 민준의 콘솔로 띄웠다.
“현재 속도, 시속 90만 킬로미터.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 약 87일. 항성계 스캔 결과 특이사항 없음. 비행 경로 안정적입니다.”
“수고했네.”
민준은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는 도연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는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인류가 알지 못하는, 혹은 잊어버린 무언가가. 그들은 그것을 찾기 위해 이 머나먼 여정을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원, 새로운 지식, 혹은 인류 문명의 잃어버린 조각. 기대감과 함께 찾아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함장님! 이상 신호 포착!”
바로 그때였다. 사령실의 정적을 찢고 과학 담당관 이지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민준의 심장이 철렁했다. 이지현은 평소 좀처럼 흥분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토록 다급하다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일 터였다.
“자세히 보고해, 이지현 박사!”
민준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현은 이미 자신의 콘솔 앞에 바싹 붙어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눈은 화면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약 0.5파섹 지점에서 중력장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극도로 미약하지만, 너무나도… 규칙적입니다.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항성계의 영향권도 아니고요. 이 부근엔 그럴 만한 천체가 없습니다!”
“규칙적이라고?”
민준이 되물었다. 이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사령실 중앙 화면에 띄웠다.
“네. 주기적으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합니다. 매우 느리지만, 완벽한 패턴입니다. 그리고… 스펙트럼 분석 결과, 현재 인류가 아는 어떤 물질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금속도, 유기물도, 알려진 에너지원도 아니에요. 말 그대로 ‘없음’에 가까운 신호입니다. 마치… 저 너머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외감과 함께 섬뜩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도연이 옆에서 화면을 응시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니.”
“기관실은 비상 대기해! 박진우 기관장, 현재 동력 계통 이상 없는지 확인하고 대기 바람!”
민준은 곧장 기관 담당관 박진우에게 지시했다. 박진우의 굵직한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현재 동력 100%, 모든 계통 이상 없습니다! 즉시 비상 대기하겠습니다!”
민준은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작은 점 하나가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일까. 이지현의 말대로라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였다.
“이지현 박사, 목표로 접근한다. 경로 계산하고, 최고 속도로 설정해.”
“함장님!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미지의 물체에 너무 빠르게 접근하는 것은…”
도연이 우려를 표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명백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알아. 하지만 저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야.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잊었나? 미지의 것에 대한 탐사, 그것이 우리의 임무다.”
민준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이 임무의 가장 선두에 선 자였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이 미약한 신호가 무언가 엄청난 것의 서막임을 알리고 있었다.
“함장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경로 설정 완료. 가속합니다.”
도연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의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르테미스 호의 엔진이 더욱 격렬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거대한 함선은 굉음을 내며 전방의 미지 점을 향해 속도를 끌어올렸다. 별빛이 창밖으로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수십 시간의 비행 끝에, 아르테미스 호는 마침내 그 신호의 근원지에 도달했다.
“충격 흡수 장치 최대 가동! 모든 승무원은 좌석에 착석하고 안전벨트를 조여라! 접근 속도 줄여!”
민준의 지시에 따라 아르테미스 호는 조심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사령실의 화면에는 점차 선명해지는 물체의 실루엣이 잡혔다.
“육안 확인… 가능합니다!”
이지현이 숨을 삼키며 말했다.
아르테미스 호의 거대한 전면 창 너머로, 우주에 홀로 떠 있는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검은색 정육면체였다. 그러나 완벽한 정육면체는 아니었다. 모서리가 존재하지 않는 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과, 빛을 흡수하는 듯한 기이한 재질. 표면은 한없이 매끄러웠고, 그 어떤 흔적도, 이음새도, 문양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태초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것처럼, 혹은 단 하나의 완벽한 조각처럼.
“맙소사…” 도연이 낮은 신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측정 결과, 크기는 대략 300미터 x 300미터 x 300미터. 밀도는… 측정 불가입니다. 중력장을 생성하는 것 외에는 어떤 에너지 방출도 없습니다. 내부 구조도 파악이 안 돼요. 그저… ‘텅 빈’ 것 같습니다.”
이지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함께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민준은 눈을 깜빡였다.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한 기묘한 표면. 그것은 그가 평생 학습하고 보아온 어떤 물질의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류의 과학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미지의 존재.
그때였다. 물체가 아주 미세하게, 맥동하듯 꿈틀거렸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 움직임과 동시에, 민준은 환영을 본 듯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속삭임이 귓가를 스치는 것 같았다. 언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한 의미를 담은 목소리였다.
*…기다렸다…*
“함장님, 괜찮으십니까?”
도연의 목소리에 민준은 정신을 차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하지만 이지현과 도연의 얼굴에도 옅은 불안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 역시 무언가 감지한 것일까?
“이지현 박사, 탐사정 발사 준비해. 우리가 직접 확인해야겠다.”
민준의 명령에 이지현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 순간,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에서 마치 깊은 심연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처럼, 날카로운 고주파음이 아르테미스 호의 선체 전체를 강타했다. 모든 불빛이 일제히 깜빡였고, 사령실 내의 기기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함장님! 선체 전반에 걸쳐 중력 이상! 실드 출력 저하! 내부 통신… 먹통입니다!”
도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민준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화면 속의 검은 정육면체는 이제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은 눈부셨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불길한 어둠을 품고 있었다. 그 빛이 아르테미스 호의 투명 막을 꿰뚫고 사령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민준의 눈에, 정육면체의 표면에 어떤 형상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형체가 없는 형상이었다. 무정형의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마치 셀 수 없는 눈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함장님…!”
이지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화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것… 저것 좀 보세요!”
검은 정육면체의 중앙에서, 마치 거대한 눈꺼풀이 열리듯, 빛을 머금은 틈이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 어둠은 단순한 공간의 공허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심연,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끝없는 무(無)의 나락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삐져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연기처럼 흐느적거리는 검은 촉수 같기도 하고, 무수한 실오라기가 엉킨 형상 같기도 했다. 느리지만 끈질기게, 그것은 정육면체의 틈새를 비집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마치, 아르테미스 호의 모든 승무원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공포를 형상화한 듯했다.
서민준 함장은 얼어붙은 채 그것을 응시했다. 그의 뇌리에서, 오래전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모든 것을 짓누르던 검은 그림자. 바로 그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귓가에 다시 그 속삭임이 명확하게 들려왔다.
*…찾아왔는가…*
그 목소리는 뇌리를 파고들어 영혼을 갉아먹는 듯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그것은 단순한 외계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오랜 세월 인류를 기다려온 무언가였다.
그리고 이제, 그 기다림이 끝났다.
아르테미스 호의 선체 전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승무원들의 억눌린 비명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