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발에 밟혔다. 으스스한 골짜기의 밤은 차가운 암석처럼 등골을 스치며 파고들었고, 리엘은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나아갔다. 매 발걸음마다 가느다란 모래와 작은 돌멩이들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협곡의 정적을 깨뜨렸지만, 그녀의 심장 소리만큼 크지는 않았다. 심장이 턱밑까지 차올라 고동쳤다. 이 금지된 만남의 장소까지 이르는 길은 항상 이토록 길고 위험했다.
거친 바위벽을 타고 흐릿한 달빛이 기형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끔씩 들려오는 야수의 울음소리가 협곡 아래에서 메아리쳤고, 리엘은 그 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마법사였다. 빛과 그림자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고대 언어로 주문을 읊어 불꽃을 피우거나 얼음을 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달빛 협곡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녀의 모든 힘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가파른 비탈을 지나자, 바위 틈새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푸른빛이 보였다. ‘별빛 샘’. 이곳은 은밀한 약속의 장소이자,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그들만의 성역이었다. 리엘은 마지막 남은 몇 걸음을 내딛으며 숨을 골랐다. 들이쉬는 숨마다 섞여 들어오는 풀 내음과 흙 내음, 그리고… 익숙한 비린내와 야성의 향.
“카엘.”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온 이름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푸른빛이 감도는 샘물 옆, 거대한 바위 그늘 아래에 서 있는 실루엣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번뜩였다. 날카롭지만, 동시에 깊은 갈망을 담고 있는 짐승의 눈빛. 늑대인간, 카엘이었다.
그는 반인반수의 형상이었다. 인간의 것보다 훨씬 건장하고 탄탄한 근육질 몸 위로 짙은 회색 털이 덮여 있었다. 찢어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는 사냥개보다도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 있었고, 귓바퀴는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놀랍도록 인간의 표정을 띠고 있었다. 슬픔, 불안, 그리고 그녀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
카엘이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발소리는 무거웠지만, 동시에 사뿐했다. 리엘의 눈은 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차가운 손을 뻗어 리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거친 털이 손등을 덮고 있었지만, 그가 전하는 온기는 뜨거웠다.
“오느라 힘들었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섞인 듯한 미성. 듣는 이의 심장을 단숨에 움켜쥘 것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네 얼굴을 보면 모든 걸 잊어버리니까.”
리엘은 애써 미소 지었다.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따스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위안이었다.
“너무 늦어서 걱정했다.”
카엘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단단한 근육과 부드러운 털이 뒤섞인 몸이 그녀를 감쌌다. 늑대의 냄새, 숲의 냄새, 그리고 그의 체취가 그녀를 압도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이 순간만큼은 중요하지 않았다. 금지된 종족 간의 사랑? 어둠 속에 숨어들어야 하는 운명? 그 모든 것이 이 품 안에서는 사소한 것이었다.
“오늘은… 뭔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어. 동족들이… 이 근처를 맴도는 것 같았어.”
리엘의 품에 안겨 있던 카엘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 그의 어깨를 감싼 리엘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발각. 늑대인간 사회에서 인간과의 교류는 곧 죽음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부족 전체의 명예를 더럽히는 끔찍한 대죄였다.
“괜찮아. 내가 마법으로 기척을 숨겨뒀어.”
리엘은 그의 등에서 떨리는 손을 느꼈다. 카엘의 숨결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더욱 거칠어졌다.
“그들이… 너를 해칠까 봐 두렵다, 리엘. 만약 내가 네게서 늑대의 피 냄새를 맡으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을 거야.”
그의 목소리에 짙은 고뇌가 서렸다. 늑대인간의 후각은 감히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했다. 그의 동족들이 리엘의 몸에서 자신과의 접촉으로 인한 늑대인간의 기척을 감지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결과가 이어질 터였다.
리엘은 카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야성적이면서도 슬픔으로 가득 찬,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두려워하지 마. 난 괜찮아. 그리고… 너와 함께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어.”
그녀의 말에 카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리엘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그의 손이 그녀의 섬세한 손을 완전히 감쌌다. 그들의 손은 너무나 달랐지만, 이 순간만큼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
“사랑한다, 리엘. 온 마음을 다해.”
“나도, 카엘. 언제나.”
그들의 입술이 서로에게 닿았다. 차가운 달빛 아래, 별빛 샘의 푸른 기운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입술이 닿는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위험이 사라지는 듯했다. 오직 그들의 심장 소리만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입맞춤.
그때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마치 누군가 무언가를 쫓는 듯한 거친 발소리였다. 그것은 분명 늑대인간의 발소리였지만, 카엘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자비하게 들렸다.
카엘의 몸이 순식간에 경직됐다. 그의 뾰족한 귀가 쫑긋 세워졌고, 콧구멍이 크게 벌어졌다. 그는 즉시 리엘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의 눈동자는 번뜩이며 어둠을 꿰뚫으려 했다.
“…동족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야수의 본능이 위험을 감지하고 격렬하게 반응하는 소리였다.
“누군가를… 쫓고 있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숲의 깊숙한 곳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낮은 포효가 울려 퍼졌다. 분명히 늑대인간 무리였다. 그것도 사냥에 나선 늑대들. 그리고 그들이 쫓는 무언가가, 점점 이 별빛 샘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카엘, 어떡해…”
리엘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얼어붙은 몸을 움직여 주머니에서 마법 촉매를 꺼내 들었다. 방어 마법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늑대인간 무리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카엘은 리엘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드리워졌다.
“숨어. 내가… 그들을 유인할게.”
“안 돼! 너 혼자서는…!”
“내가 이들을 모르는 척하고 다른 방향으로 유인하면 돼. 날 따라오지 못하게.”
카엘은 리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눈빛이었다.
“사랑한다, 리엘. 다시 만날 때까지…”
그는 리엘을 밀어내듯 바위틈새 안쪽 깊숙한 곳으로 보내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협곡의 어둠 속으로, 사냥에 나선 늑대인간 무리의 소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기다려! 카엘!”
리엘의 목소리는 그의 등 뒤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거친 발소리와 함께 숲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그림자를 보며, 그녀는 바위틈새에 몸을 숨겼다. 희미한 푸른빛이 감도는 별빛 샘은 여전히 조용히 빛나고 있었지만, 그 빛은 이제 차가운 절망처럼 느껴졌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늑대인간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리엘은 카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포효는 분노에 찬 외침이라기보다, 무언가를 속이는 듯한 날카로운 경고음에 가까웠다.
‘카엘…!’
바위틈새에 웅크린 채, 리엘은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늑대들의 사냥 소리, 그리고 그 속에 섞인 한 남자의 처절한 울부짖음.
금지된 사랑의 대가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리엘은 차가운 바위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