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삼한의 땅, 아니, 그보다 더 먼 조상들의 시대부터 ‘영겁의 어둠’은 주기적으로 이 세상을 잠식하려 들었다. 그림자가 드리우는 날, 강물이 검게 물들고 하늘에선 핏빛 비가 내렸으며, 모든 생명은 그 어둠에 굴복해 스러져갔다. 허나, 세상은 영원히 암흑에 갇히지 않았다. 위대한 무인들이 한데 모여 천하의 운명을 건 무도대회를 열었고, 그곳에서 진정한 ‘천명(天命)’을 받은 자가 어둠을 물리치는 성스러운 의식을 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의 본산이자, 천하의 기운이 모인다는 ‘운룡대제단(雲龍大祭壇)’ 아래,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우뚝 솟아 있었다. 수많은 무림인들과 백성들,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여덟 가문(八家門)의 수장들이 숨죽인 채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가 과연 ‘영겁의 어둠’을 막아낼 진정한 천명자일까.
결승전.
푸른 하늘을 가르는 듯한 거대한 경기장 중앙에 두 그림자가 마주 서 있었다. 한 명은 천하제일문의 젊은 고수, ‘운무성(雲霧聖)’이라 불리는 운현이었다. 그의 푸른 도포는 바람 한 점 없는 경기장에서도 미미하게 펄럭이는 듯했고, 그의 눈빛은 짙은 안개처럼 속을 알 수 없었다. 운무성은 현존하는 무림의 정점에 선 자로 평가받았다. 그의 검은 한 번 휘둘러지면 구름이 흩어지고 안개가 걷히는 듯하여, 그 어떤 것도 그의 예봉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이름은 벽하(碧河). 강호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문파의 후예였다. 그의 옷은 평범한 검은 무복이었고, 손에 쥔 검은 녹슨 철검처럼 투박해 보였다. 그의 눈빛은 고요한 강물 같았다. 언뜻 보기에 평범해 보였지만, 그 속에 숨겨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벽하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강자들을 꺾어왔다. 그의 무학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직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상대의 틈을 정확히 파고드는 찰나의 예리함만이 있었다.
경기장은 침묵에 잠겼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이름 없는 자여.” 운무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료했다.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이다. 허나, 천명은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너와 같은 어둠 속의 무학을 익힌 자에게는 더욱.”
벽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의 무학은 ‘어둠 속의 무학’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모든 이들이 외면했던, 사라져가는 자연의 이치를 담은 무학을 지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설명은 무의미했다. 천하제일문은 늘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방식만이 옳다고 여겼다.
“천명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벽하가 나직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제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운무성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건방진 소리. 네가 감히 천하제일문의 무학을 논하려 하는가? 보여주마. 진정한 무가 무엇인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무성의 검이 번뜩였다. ‘운룡출수(雲龍出水)!’ 그의 검은 마치 구름 속에서 용이 솟아나는 듯한 기세로 벽하에게 돌진했다. 잔상은 구름처럼 흩어지고, 실제 검의 궤적은 안개처럼 모호하여 어디서 공격이 들어오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천하제일문의 ‘운무검법(雲霧劍法)’이었다. 환영 속에 진실이 숨어 있고, 진실 속에 환영이 깃든 절대의 검.
벽하는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오직 검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의 귓가에는 운무성이 휘두르는 검이 일으키는 바람 소리, 그의 발소리, 심지어 그의 심장 박동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벽하의 몸은 연못에 뜬 낙엽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운무성의 칼날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벽하는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칼날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고, 차가운 살기가 그의 피부를 긁었다.
“흐읍!” 관중석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엄청난 운무성의 일격을 막아낸 것도 모자라, 피해냈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했다.
운무성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운무십삼식(雲霧十三式)’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마치 수십 명의 운무성이 동시에 검을 휘두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의 검이 만들어내는 파공음은 폭풍우 같았고, 검의 궤적은 거대한 용오름처럼 벽하를 집어삼키려 했다.
벽하는 물고기처럼 유영하며 공격을 피했다. 그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었다. 직선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꺾이고, 멈춰서는 듯하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한 신출귀몰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검은 아직 뽑히지 않았다. 오직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또 피할 뿐이었다.
“왜 공격하지 않는 것이냐!” 운무성의 목소리에 드디어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그의 공격이 계속해서 빗나가자 조급함이 엿보였다. “네 검은 장식품인가!”
벽하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흐르는 물은 바위를 피할 뿐, 먼저 바위를 부수려 들지 않습니다.”
“궤변!” 운무성이 크게 외치며 검을 위로 쳐들었다. 하늘의 구름이 그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듯, 거대한 검기가 경기장을 뒤덮었다. ‘운무천붕(雲霧天崩)!’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세로, 수십 자에 달하는 검기가 벽하를 짓누르려 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그 순간, 벽하의 눈이 번뜩였다. 고요한 강물 같던 눈빛 속에 격렬한 파동이 일었다. 그는 마침내 허리에 찬 녹슨 검을 뽑았다. ‘쉭-‘ 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발도였다.
그의 검은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저 직선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마치 흐르는 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듯, 가장 자연스러운 이치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그 검 끝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기운이 응축되어 있었다. 벽하의 검이 운무성의 거대한 검기와 부딪쳤다.
콰아앙!
귀청을 찢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경기장의 바닥이 울리고, 관중석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모래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연기가 걷히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운무성의 거대한 검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운무성은 검을 든 채,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푸른 도포 자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명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금(實金)이 길게 나 있었다.
벽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검은 땅을 향해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표정은 다시 고요한 강물처럼 변해 있었다.
“너는… 무엇이냐?” 운무성의 목소리가 떨렸다. 경악과 혼란이 그의 차가운 표정을 뒤덮었다. “어떻게… 내 운무천붕을…!”
“물은 바위를 부수지 않습니다.” 벽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다만, 흐를 뿐입니다. 바위의 가장 약한 틈새로 스며들고, 수없이 오랜 시간 동안 바위를 깎아내고, 결국에는 바위 스스로 무너지게 합니다. 저는 그저 그 흐름을 따랐을 뿐입니다.”
벽하의 검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은밀하게. 운무성의 시야에서는 그의 검이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검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운무성은 비틀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그의 검은 땅에 떨어져 부러졌다. 푸른 도포가 축 늘어졌다. 그의 목에는 가느다란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지만, 그 선은 그의 패배를 분명히 알렸다.
“흐… 으음…” 운무성은 무릎을 꿇었다. “천명… 흐음… 너에게… 있었다는… 말인가…”
그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했다.
경기장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경외와 충격,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뒤섞인 침묵이었다. 이름 없는 무인이 천하제일문의 고수를 꺾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무력으로.
벽하는 쓰러진 운무성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했다. 그는 검을 칼집에 꽂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운룡대제단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경기장 위에서 팔가문의 수장 중 한 명인 용무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천명… 그에게 있었단 말인가. 정녕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자가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벽하는 제단 앞에 섰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앞에는 굳게 닫힌 제단의 문이 있었다. 그 문 너머에는 ‘영겁의 어둠’을 물리치는 의식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그는 문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벽하는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자연의 흐름만이 가득했다. 그의 무학이 말해주듯, 물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을 스며들게 하며, 결국에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어둠은 형체가 없는 것이었다. 검으로 베거나, 힘으로 부수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어둠이란 세상의 불안과 혼돈,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그림자일지도 몰랐다.
벽하는 제단 문을 밀어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고요한 강물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진정한 천명은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이 세상을 이해하고, 가장 겸허하게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기꺼이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단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 세상 속에서, 그 빛은 작은 희망의 불꽃처럼 보였다. 그 불꽃이 과연 영겁의 어둠을 태워 없앨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벽하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흐르는 물처럼, 멈추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며. 천하의 운명은 이제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고요한 강물처럼 평온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흐르는 물이었다. 그리고 물은, 길을 찾지 못하는 법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