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잿빛 하늘 아래서**
차가운 바람이 거친 흙먼지를 몰아와 얼굴을 때렸다. 강하늘은 눈을 가늘게 떴다. 퀘스트를 받고자 찾아간 주점의 문턱을 넘기 직전, 눈앞에 펼쳐진 현실감 넘치는 광경에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낡은 목제 간판, 안에서 흘러나오는 싸구려 맥주와 훈제 고기의 냄새, 그리고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까지. 이게 단순한 게임이라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게임 ‘에테르나’의 최고 난이도 서버인 ‘무명인의 땅’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생존 자체가 퀘스트이자 목표였다.
하늘은 등짐을 고쳐 메고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냄새와 뜨거운 온기가 한꺼번에 그를 반겼다. 내부에는 이미 몇몇 광부들과 이름 없는 전사들이 낡은 나무 탁자에 앉아 묵묵히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들의 무뚝뚝한 표정은 이곳 돌바람 마을의 삭막한 현실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잿빛 하늘이 영원히 개지 않을 것만 같았다.
“뭘 찾으세요, 젊은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하늘은 고개를 돌렸다. 턱수염이 덥수룩한 주점 주인, ‘거트’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피곤에 절어 있었다.
“오늘 밭에 뿌릴 씨앗이 필요합니다. 혹시 마을 대장님이 의뢰를 맡기신 게 있나요?”
하늘의 말에 거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씨앗? 그딴 게 뭐가 중요하다고. 곧 성벽 제국의 세금 징수관들이 올 거야. 다들 그걸 걱정하고 있지.”
“또 세금인가요?”
하늘의 목소리에도 피로가 묻어났다. 한 달에 두 번, 성벽 제국의 징수관들이 돌바람 마을을 찾았다. 황폐해진 땅에서 겨우 수확한 것의 절반 이상을 빼앗아 가는 그들의 횡포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매번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했고, 하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늘은 뭘 또 뜯어갈까. 쯧.”
거트가 혀를 찼다. 그는 탁자를 닦던 낡은 천을 집어 던지고는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하늘은 의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구석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었다.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탄 일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국군 기사들의 번쩍이는 갑옷이 잿빛 하늘 아래서 더욱 오만하게 빛났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징수관들은 붉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마을의 활기 없던 움직임마저 완전히 멈춰 섰다. 아이들은 엄마의 치마폭 뒤로 숨었고, 노인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선두에 선 기사가 말을 멈추고 마을 중앙에 우뚝 섰다. 그의 투구 아래로 언뜻 보이는 얼굴은 차갑고 무감각했다. “돌바람 마을 주민들은 모두 모여라! 황제 폐하의 명이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을 전체를 울렸다. 주점 안에 있던 이들도 술잔을 내려놓고 하나둘 밖으로 향했다. 하늘도 그들을 따라 나섰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징수관 중 한 명이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치며 쩌렁쩌렁 외쳤다. “선포하노라! 돌바람 마을은 지난달 수확량이 저조한 관계로, 황제 폐하의 자비로운 배려로 추가 식량세 납부를 명하노라! 기한은 오늘 일몰까지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식량세는 이미 거두어갔는데, 추가 식량세라니. 굶주려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추가 식량세라니! 이미 낼 것도 없는데 뭘 더 내라는 겁니까!”
어디선가 굵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광부 ‘덩치’였다. 그는 평소에도 불만이 많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반발한 적은 없었다.
징수관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불복종이냐!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는가!”
그의 손짓 한 번에 기사 두 명이 덩치에게 달려들었다. 덩치가 거칠게 저항했지만, 훈련된 기사들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덩치는 곧 땅에 엎드려졌고, 등에 묵직한 발길질이 꽂혔다. 억누르던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것이 황제 폐하의 자비로운 배려다! 불만 있는 자는 덩치처럼 될 것이다!”
징수관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마을을 지배했다. 마을 사람들은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몇 번의 반항 끝에 돌아온 것은 더 혹독한 처벌뿐이었으니까.
하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봐야 하는 이 무력감이 그를 가장 괴롭게 했다.
징수관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마을 어귀에 앉아 있던 순덕 할머니에게 닿았다. 순덕 할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로 앉아 손에 든 낡은 천 조각을 꿰매고 있었다. 평소에도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축에 속하는 노인이었다.
“할멈! 너는 식량세 준비됐느냐?”
순덕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나, 나는… 낼 것이 없는데… 젊은이들…”
“시끄럽다! 네가 뭐가 없다고 감히! 세금은 백성의 의무! 네 방에 있는 것이라도 모조리 가져와라!”
징수관은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두 명의 기사가 순덕 할머니의 허름한 오두막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은 낡은 이불 몇 장과 깨진 도자기 그릇 몇 개를 들고 나왔다. 그나마 순덕 할머니의 전 재산이었다.
“이것밖에 없어? 이 늙은이가 감히 황제를 우롱하느냐!”
징수관은 들고 나온 물건들을 발로 걷어찼다. 쨍그랑! 깨진 도자기 그릇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덕 할머니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내 밥그릇…”
할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하늘의 귓가에 박혔다. 평생을 허리 휘도록 일했으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노인이었다. 그 밥그릇 하나마저 빼앗기고 부서지는 순간, 할머니의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늘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이 모든 불의에 대한 저항심이었다.
그때, 하늘의 시야에 순덕 할머니 옆에 서 있던 한 소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할머니의 손녀인 ‘리아’였다. 리아는 징수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작고 앳된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맹렬한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가 뒤섞인,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하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불씨처럼 보였다.
하늘은 리아의 눈빛에서 자신과 같은 감정을 읽었다. 이 부패한 제국 아래서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숨겨진 열망을.
그는 다시 한번 징수관과 기사들을 쳐다봤다. 불합리한 권력 앞에서 무릎 꿇는 대신, 이제는 그들에게 맞서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잿빛 하늘 아래, 그는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서서히 타오르는 결의를 느꼈다. 아직은 작은 불꽃이었지만, 언젠가 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거대한 불길의 시작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