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아르카나 마법학원의 첨탑 위로 짙은 보라색 장막을 드리웠다. 고고한 마나의 흐름이 교정을 감싸고, 별빛 아래 반짝이는 마법 룬들이 고색창연한 건물들을 신비롭게 비추는 시간. 대부분의 학생들은 꿈나라를 헤매거나 은밀히 금지된 마법 서적을 탐독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서강민, 그는 예외였다.
“젠장, 대체 이걸 왜 나한테 시키는 거야.”
강민은 손목의 마력 시계를 힐끗 보았다. 새벽 2시 17분. 도서관 지하 서고의 먼지 쌓인 마법 유물 목록을 정리하는 일은 신입생에게나 어울릴 법한 잡일이었다. 그것도 일주일 내내 저녁 당번으로 끌려다닌 자신에게 말이다. 하지만 학원장인 에르윈 교수님의 특별 지시라는 말에,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낡은 랜턴을 든 채 어둠 속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법 지팡이는 그저 장식처럼 허리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축축한 공기가 지하로 내려갈수록 코끝을 스쳤다. 마법으로 온도가 조절되는 학원 내부와는 확연히 다른 냉기였다. 돌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마침내 ‘제7 서고’라는 표지가 붙은 낡은 철문이 나타났다.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가자, 곰팡이와 눅진한 잉크 냄새가 뒤섞인 음침한 공기가 강민을 맞이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천장까지 닿는 빽빽한 서가, 그리고 그 사이를 가득 채운 고문서와 정체 모를 유물들.
강민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서고는 다른 곳과는 달랐다. 마나가 희미하고, 어딘가 모르게 기분 나쁜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숨죽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내고 싶었지만, 에르윈 교수님은 늘 완벽주의자였다.
오랜 마법 유물 목록을 들여다보던 강민의 눈이 한 지점에 멈췄다. ‘비정상적인 마나 유출 감지 구간 – 접근 금지’. 그것은 다른 경고문들과는 다른, 붉은색 잉크로 덧칠된 강렬한 경고였다. 강민은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런 구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오래된 경고문일까?
그 순간이었다.
_스륵… 척… 스르르륵…_
아주 희미하게,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축축한 바닥을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강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랜턴을 바싹 쥐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은 서가 뒤편, 햇빛조차 닿지 않을 것 같은 가장 안쪽 벽이었다.
다른 서고의 벽과는 미묘하게 다른 질감. 빛바랜 벽돌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틈새. 강민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벽을 더듬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 벽의 일부가 마치 거대한 문처럼 안쪽으로 살짝 밀려 있는 것이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교묘하게 감춰진 비밀 통로였다.
“…이게 뭐야.”
강민은 호기심과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그 틈새를 들여다봤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나왔고, 그 바람에는 끈적거리는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돌아갈까? 아니면… 이 금기를 마주할까?
학원장의 특별 지시, 붉은 경고문, 그리고 이 비정상적인 문. 모든 것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결국, 젊은이 특유의 어리석은 용기, 혹은 지독한 호기심이 그를 움직였다. 강민은 주저하며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오랜 침묵을 깨는 끔찍한 소음이 서고를 울렸다. 문은 안쪽으로 아주 쉽게 열렸다. 그 너머는 더욱 깊은 어둠의 심연이었다. 랜턴을 비추자,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은 매끄럽고 어두운 돌로 되어 있었고, 그 표면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강민은 한 발짝 내딛었다.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단순히 축축한 것이 아니라, 마치 그의 폐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마저 느껴졌다. 비린내는 더욱 강렬해졌고, 귓가에는 정체 모를 환청이 들려오는 듯했다.
_쉬이이익…_
_웅웅…_
_흐느끼는 듯한…_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한 감각 속에서도 강민은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이끌리는 인형처럼. 얼마나 내려갔을까.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희미하고 기이한, 마치 심해의 발광 생물에서나 나올 법한 푸른빛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마침내 계단의 끝에 다다랐을 때, 강민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곳은 거대한 원형 공간이었다. 천장과 벽은 뼈처럼 흰 물질로 뒤덮여 있었고, 바닥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은 마치 살아있는 듯 희미하게 꿈틀거렸고, 그 위에는 기이한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푸른빛은 그 액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액체의 표면에는 수많은 형체가 뒤엉켜 일렁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길한 조합이었다.
물고기의 비늘, 곤충의 날개, 뱀의 비늘, 그리고 이름 모를 촉수들.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액체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그림자가 비쳤고, 그 움직임에 맞춰 공간 전체가 미약하게 진동했다.
강민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질문들이 폭풍처럼 몰아쳤지만, 단 하나의 해답도 찾을 수 없었다. 저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학원 지하에 이런 것이 숨겨져 있는가? 학원장인 에르윈 교수님은 이걸 알고 계셨을까? 아니, 그분이 이걸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스쳤다.
그때, 제단 위 액체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푸른빛이 더욱 강렬해졌고, 강민의 귓가에 전에 없던 거대한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_오래… 기다렸다…_
_오라…_
_하나가… 되자…_
그것은 언어라고 할 수 없는, 그러나 그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고대의 음성이었다. 소리가 아니었다. 감각이었다. 그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저주받은 부름이었다. 강민의 두 눈에서 이성의 빛이 서서히 꺼져갔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와 이해할 수 없는 매혹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또 한 발짝 제단을 향해 다가갔다. 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린내가 이제는 달콤한 유혹처럼 느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에르윈 교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비정상적인 마나 유출 감지 구간 – 접근 금지.’
아니, 그것은 ‘절대 접근 금지’였다. 왜냐하면, 그곳은…
_그것_이 기다리는 곳이었으니까.
강민의 손이 제단에 닿기 직전, 그의 지팡이가 섬뜩한 푸른빛을 내며 뜨겁게 타올랐다. 학원 초기 마법사들이 부여한 자율 방어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강민의 혼탁해진 정신에 한 줄기 강렬한 고통이 스치며 잠시 이성이 돌아왔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이… 이건…!”
그 순간, 제단 속 액체가 격렬하게 끓어오르더니, 그 안에서 수없이 많은 눈동자들이 튀어나왔다. 끔찍한 푸른빛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강민을 노려봤다. 그 눈들은 희망이라곤 없는 심연 그 자체였다. 그의 존재를 송두리째 삼켜버릴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
강민의 비명은 목구멍 안에서 찢어졌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성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 본능적인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그는 랜턴을 내팽개치고, 미친 듯이 뒤돌아 어두운 나선형 계단을 향해 달렸다. 그의 뒤에서, 거대한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저음의 울림이 그의 등골을 꿰뚫었다.
_돌아오라…_
_어리석은… 인간…_
강민은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며, 그 뒤편에서 끈적이는 그림자가 자신을 쫓아오는 환상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미 광기가 서려 있었다. 아르카나 마법학원의 지하에는, 단순한 금기를 넘어선, 우주적인 공포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서강민은, 이제 그 끔찍한 진실을 목도하고 말았다. 그는 과연 이 진실을 외면한 채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그 진실에 완전히 잠식될까?
그의 등 뒤에서, 학원 지하의 어둠은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숨 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