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심야의 비명
재하의 망막은 푸른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27층의 좁은 스튜디오 아파트는 도시의 한 조각을 간신히 뜯어낸 듯, 창밖으로는 끝없이 솟아오른 마천루들이 숨 막히게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밤이 깊어도 도시는 잠들지 않았다. 빛과 소음은 닳아빠진 재하의 신경망을 끊임없이 긁어댔지만, 그는 이미 익숙한 풍경처럼 키보드 위를 유영하는 손가락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불법 정보 브로커, 혹은 자칭 ‘정보의 연금술사’. 타인의 비밀을 캐내고, 필요에 따라 가공하여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모니터에 띄워진 암호화된 데이터를 해독하던 재하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시스템의 방어벽이 생각보다 끈질겼다. 턱을 괸 채 잠시 숨을 고르는데, 갑자기 스튜디오 천장의 슬림형 조명등이 ‘팟!’ 하고 짧게 깜빡였다. 재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빌딩은 벌써 30년이 넘은 구식이었다. 간혹 전력 계통에 문제가 생기곤 했다.
다시 화면에 집중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주방 아일랜드에 놓인 스마트 조리기가 혼자 전원 버튼을 깜빡였다. ‘띠리릭’. 미미한 전자음이 고요한 공간을 파고들었다. 재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한 손으로 컵을 들어 목을 축이려다가, 문득 손에 든 컵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컵 안의 물이 미세하게 파동을 일으키며 찰랑거렸다.
“뭐야… 지진인가?”
고층 건물 특유의 진동인가 싶었지만, 그의 발아래는 굳건한 금속 합금 바닥이었다. 진동은 없었다. 대신, 등 뒤에서 묘한 한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재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거실을 바라봤다.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늘 똑같은 가구와 오래된 데이터 패드, 그리고 텅 빈 공간뿐이었다.
그때, 재하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빈 생수병이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밀린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었다. 플라스틱 병이 바닥을 긁는 ‘스스슥’ 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재하의 심장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밤샘 작업으로 지쳐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젠장, 드디어 미쳤나.”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거실의 스마트 공기청정기가 굉음을 내며 최대 출력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필터가 막힌 듯한 거친 소음과 함께 냉기가 실내를 휘몰아쳤다. 재하는 움찔하며 손을 뻗어 조작 패널을 눌렀지만, 공기청정기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패널에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빠르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알아볼 수 없는 언어, 혹은 단순한 시스템 오류 코드.
“이봐, 멈춰! ‘정지’ 명령!”
재하가 소리쳤지만, 공기청정기는 그의 음성 명령을 완전히 무시했다. 냉기는 점차 강해졌고, 방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차가워졌다. 재하는 초조하게 휴대용 단말기를 꺼내 아파트 관리 시스템에 접속했다. 중앙 시스템의 문제인가? 아니면 누군가 그의 아파트 네트워크를 해킹한 것인가?
로그 기록을 확인했지만,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어떠한 외부 침입 흔적도, 시스템 오류 기록도 없었다. 마치 그 모든 현상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진 듯했다. 그는 등골에 맺히는 식은땀을 느꼈다.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때, 거실의 홀로그램 스피커에서 노이즈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 차분하고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찌그러지고 왜곡된, 마치 여러 개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였다.
*“……어…서…와….”*
짧은 한 음절이 길게 늘어지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재하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누구냐! 누구냐고!”
재하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귓속에서도 떨리고 있었다. 눈앞의 공기청정기 패널에서는 기괴한 기호들이 더욱 격렬하게 점멸했다. 홀로그램 스피커에서는 노이즈가 폭풍처럼 몰아쳤고, 마치 그 소음 속에서 무언가 형체를 만들어내려는 듯, 희미한 붉은빛이 깜빡였다.
순간, 재하의 뒤편에서 ‘콰당!’ 하는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작업실 책상에 놓여있던 데이터 패드 수십 대와 단말기들이 공중으로 솟아올라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충격으로 전원이 켜진 몇몇 스크린은 섬뜩한 붉은색 오류 메시지를 토해내고 있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재하가 사용하던 값비싼 장비들이었다.
“이 개자식아!”
재하는 비명을 지르며 작업실로 달려갔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시야를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책상 한구석에 세워져 있던, 재하의 어린 시절 사진이 담긴 액자가 천천히 회전하는 것이었다. 액자 속 어린 재하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그를 노려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액자는 더 이상 회전하지 않았다. 대신, 액자 유리면 위에 붉은색 글자들이 스르륵, 하고 피어났다. 마치 손가락으로 쓴 듯한, 서툴고 비뚤어진 글씨였다.
[네가]
재하의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액자에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글씨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떠나지]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분명 이곳에 있었다. 그를 지켜보고, 그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그를 조롱하듯이…
[않으면]
재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비좁은 스튜디오 아파트의 벽에 등이 닿았다. 눈앞의 액자는 마치 피로 쓴 듯한 글씨를 완성하고 있었다.
[죽어]
마지막 글자가 완성됨과 동시에, 스튜디오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암전.
재하의 비명이 어둠 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