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숨 막히는 절벽 끝, 칼날 같은 바람이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얇은 천 조각 같은 망토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고, 살을 에는 듯한 한기는 뼈마디 깊숙이 스며들어 몸뚱이를 끊임없이 덜덜 떨게 만들었다. 엘라는 낡은 가죽 조끼 아래 움켜쥔 한 뼘짜리 은빛 단검을 더욱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만이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 같았다.

아득한 눈 아래로는 황량한 설원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흰색과 회색만이 존재하는 죽음의 땅. 한때는 온갖 생명이 넘실대던 푸른 대지였건만, 이제는 저주받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불모의 땅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이 불과 3년 전, 그날 밤에 시작되었다.

엘라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에서, 선명하고도 잔혹한 환상이 되살아났다.

***

시간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젠티움 제국의 심장부,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마나 샘 위에 세워진 수정 궁전은 언제나 활기로 넘쳤다. 그곳에서, 엘라와 카엘은 쌍둥이처럼 자랐다. 제국의 두 기둥, 마나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존재들. 황실 직속의 최고 마도사이자, 검과 마법으로 제국을 수호하는 빛나는 방패.

“엘라! 너 오늘 또 내 스파링 상대 도망쳤지!”

푸른 눈을 반짝이며 달려오는 카엘의 목소리는 언제나 맑은 종소리 같았다. 훈련장 한구석에 숨어 조용히 고대 문헌을 읽던 엘라의 어깨를 팔로 감으며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도망친 게 아니라, 네가 너무 시끄러워서 잠시 피신한 거야. 이대로 가다간 네 시끄러움에 마법 지팡이가 폭발할걸.”

엘라가 픽 웃으며 답했다. 카엘은 그 말에 더욱 격렬하게 웃으며 엘라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하! 내 활력이 곧 이 제국의 활력인 것을! 어서 와, 마나의 흐름이 오늘따라 유독 강하게 느껴진다고. 오늘은 필시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고대의 수호신도 소환할 수 있을지 몰라!”

그들은 항상 함께였다. 카엘의 폭발적인 마법력과 엘라의 정교한 마나 제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어떤 마법진도 그들 앞에서는 견고함을 잃었고, 어떤 고대 유물도 그들 손에서는 잠재된 힘을 드러냈다. 제국의 사람들은 그들을 ‘쌍둥이 심장’이라 불렀다. 마나의 근원에서 태어나,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는 듯 움직이는 완벽한 동반자.

“우리가 함께라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은 없어, 엘라.”

어느 밤, 수정 궁전의 가장 높은 첨탑에서 쏟아지는 별똥별을 보며 카엘이 엘라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눈은 별빛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그래, 카엘. 우리는 이 제국을, 이 세상을 지킬 거야. 영원히.”

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약속에 자신의 약속을 덧붙였다. 그들의 미래는 그렇게 확고하고도 빛나는 서약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한순간의 배신으로 산산조각 났다.

그날은 제국 역사상 가장 성대한 ‘빛의 제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수만 명의 백성이 수정 궁전 앞에 모여들었고, 거대한 중앙 광장에는 마나의 정수를 모아 만든 ‘별의 눈물’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축복의 의식’을 주관하기 위해 제단 위에 섰다. 엘라는 제단 중앙에서 정화의 마법진을 그렸고, 카엘은 그 옆에서 찬란한 보호막을 펼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엘라… 미안하다.”

나직하게 들린 카엘의 목소리는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 비수 같았다. 엘라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을 때, 카엘의 얼굴에는 낯선 미소가 걸려 있었다. 푸른 눈은 더 이상 따뜻한 빛을 머금고 있지 않았다. 차갑고, 계산적이며, 그리고… 잔혹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형태로 엘라를 향해 쇄도했다. 보호막이 되어야 할 마나가 그녀의 마법진을 파괴하고,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엘라의 몸은 비명을 질렀다. 온몸의 마나가 역류하는 고통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녀가 고통에 신음하며 쓰러지자, 축복의 의식은 파괴되었고, ‘별의 눈물’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광장에 모인 백성들의 경악 어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법진이 무너지며 터져 나온 역류하는 마나가 사방으로 흩뿌려져 사람들을 해쳤다. 혼란의 아비규환 속에서, 카엘은 태연하게 제단 중앙에 서서 엘라를 내려다보았다.

“이 제국은 네 낡은 이상에 갇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엘라.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힘이 필요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정 궁전의 경비병들이 일제히 엘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다. ‘어둠의 마녀가 제전을 망쳤다!’ 그들의 외침이 엘라의 귓가를 찢었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엘라에게 쏟아지는 칼날과 마법의 폭풍. 그 속에서 그녀는 오직 카엘의 뒷모습만을 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별의 눈물’ 앞에서, 그는 마치 새로운 왕처럼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잃었다. 황제에게서 부여받은 이름, 제국 마도사로서의 지위, 평생을 바쳐 지키려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와의 모든 기억까지. 그녀는 배신자이자, 제국을 파괴하려 한 마녀로 낙인찍혔다.

***

엘라는 다시 눈을 떴다.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이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잊히지 않는 고통의 눈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아… 하아…”

황량한 설원 위, 그녀의 발자국은 희미하게 찍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3년간, 쫓기고 또 쫓기며 세상의 끝까지 내몰린 삶이었다. 상처투성이의 몸과 마음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그녀를 쫓는 제국의 추적자들은 끈질겼고, 카엘은 마치 그녀가 숨 쉬는 곳까지 알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잊을 수 없었다. 그날의 고통과 분노를. 한때 가장 빛나는 동반자였던 그가, 자신에게 칼날을 꽂던 순간의 싸늘한 눈빛을.

발밑에 무언가 밟혔다. 고개를 숙이자, 얼어붙은 흙더미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낡은 상자. 흙과 눈에 뒤덮여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나무 상자였다.

엘라는 망설임 없이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마자, 상자의 낡은 잠금쇠가 ‘딸깍’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상자 안에는 단 하나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낡은 가죽에 싸인, 손바닥만 한 책이었다. 표지에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엘라의 손이 책에 닿는 순간, 차갑던 책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책을 펼치자, 안에 적힌 고대 문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녀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책 속에는 잊힌 시대의 마법과, 잃어버린 힘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한 줄의 경고 문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복수를 위해 깨어난 자여, 그 피의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가?’*

엘라는 그 문구를 응시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녀의 심장 한구석에서, 뜨거운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피의 대가? 좋다. 기꺼이 치르리라.

카엘. 네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으니, 나 또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찢어발겨 주리라.

차가운 바람 속에서, 엘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더 이상 비탄에 젖은 미소가 아니었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복수자의, 섬뜩하고도 처절한 미소였다.

“이제 시작이야… 카엘.”

그녀의 눈빛이 설원보다 더 차갑게 빛났다. 손에 쥔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대의 마력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고, 마치 죽었던 존재에게 생명이 부여되는 것처럼, 엘라의 등줄기에서 섬뜩한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상의 끝에서, 복수의 여정을 시작하려 했다. 그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