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대지, 그곳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오직 녹슨 철과 굳은 모래만을 허락했다. 하늘은 언제나 희뿌연 먼지로 가득했고, 해는 그저 거대한 불덩이처럼 간신히 그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이진혁은 ‘황야의 발톱’이라 불리는 자신의 메카 조종석에 앉아 무덤덤하게 전방의 스크린을 응시했다. 거친 엔진음이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고, 땀 냄새와 금속 특유의 비릿한 내음이 뒤섞여 진혁의 코를 찔렀다.
“오늘도 한바탕 난리겠군.”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지난 밤, 폐허에서 잠시 쉬며 먹은 건 말라비틀어진 건조 식량 몇 조각이 전부였다. ‘황야의 발톱’은 그와 함께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동반자였다. 겉모습은 이름처럼 온갖 고철을 기워 붙인 누더기 같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출력은 웬만한 구시대의 전차도 능가했다. 왼팔에는 거대한 키네틱 리피터가, 오른팔에는 두꺼운 장갑도 찢어발길 수 있는 유압 클로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의 유일한 규칙은 ‘살아남는다’ 그 하나뿐이었다.
오늘 목표는 구역 7, 과거 도시의 핵심 전력망이 위치했던 곳이었다. 아직도 잔류 에너지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대였고, 그만큼 ‘잔해의 짐승’들이 들끓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혁은 낡은 항법 장치에 표시된 붉은 점들을 훑었다. 에너지 코어, 그것만이 이 메마른 세상에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삐빅, 삐빅. 스크린 한쪽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저 멀리, 무너진 고층 빌딩의 그림자 사이에서 희미한 금속 반짝임이 포착됐다. ‘강철 거미’다. 놈들은 과거 전쟁에서 투입되었던 자율 전투 병기들의 잔해로, 유기체와 기계가 융합된 끔찍한 형태로 진화했다. 여섯 개의 강철 다리가 바닥을 기고, 머리에서는 붉은 센서가 섬뜩하게 빛났다.
“빌어먹을, 환영 인사치곤 너무 빠르잖아.”
진혁은 욕설을 내뱉으며 조작간을 움켜쥐었다. 황야의 발톱이 묵직한 발걸음으로 전진했다. 거미들은 세 마리, 보통 순찰대 규모였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왼팔의 리피터를 조작했다. 텅, 텅, 텅! 둔탁한 발포음과 함께 거대한 금속 탄환이 잿빛 공기를 갈랐다. 첫 발이 선두의 강철 거미의 머리를 정확히 강타했다. 강철이 찢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놈의 붉은 센서가 꺼졌다.
나머지 두 마리가 맹렬한 속도로 돌진했다. 놈들의 등껍질이 열리며 날카로운 강철 가시들이 튀어나왔다. 진혁은 황야의 발톱을 옆으로 급선회하며 가시 공격을 피했다. 놈들 중 하나가 오른쪽으로 파고들며 발톱의 다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콰앙! 진혁은 재빨리 오른팔의 유압 클로를 휘둘러 놈의 옆구리를 찍어 눌렀다. 금속이 구겨지고 부러지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남은 한 마리가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접근했다. 이번에는 정면이다. 놈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머리를 꿰뚫을 작정인가. 진혁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황야의 발톱을 웅크렸다. 강철 거미가 발톱의 등 위로 뛰어오르려는 찰나, 진혁은 리피터를 들어 놈의 복부를 난사했다. 텅, 텅, 텅! 약점이었다. 놈의 몸통에서 스파크가 튀었고, 경련하듯 움직이던 다리가 멎었다.
“하아, 하아….”
짧은 교전이었지만 진혁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조종석 안은 이미 땀으로 축축했다. 그는 파괴된 거미들을 스캔했다. 유효한 코어는 두 개. 나쁘지 않지만 충분치 않았다. 놈들이 이토록 가까이서 발견되었다는 건, 구역 7의 깊은 곳에는 더 큰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혁은 발톱을 재정비하고 폐허 깊숙이 향했다. 무너진 고가도로와 뼈대만 남은 빌딩들이 거대한 금속 미로를 이루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더욱 많은 붉은 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잔해의 짐승’들. 놈들은 마치 이 폐허의 일부인 양 위장하고 있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거대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 과거 도시의 주요 전력 공급 라인이 지나던 곳. 진혁은 황야의 발톱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안으로 진입했다. 터널 안은 칠흑 같았다. 발톱의 헤드라이트가 전방을 비추자, 낡고 부서진 전력 케이블들이 뱀처럼 얽혀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박혀 있었다.
“찾았다….”
진혁의 눈이 번뜩였다. 거대한 마더 코어. 이 정도 크기라면 최소한 한 달은 버틸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코어의 주변에는 일반 강철 거미보다 훨씬 크고 위협적인 존재가 도사리고 있었다. 몸집은 황야의 발톱만 했고, 여덟 개의 강철 다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등에는 거대한 갑옷판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붉은 센서는 마치 핏방울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강철 여왕’이다. 이 지역의 우두머리.
강철 여왕은 진혁의 침입을 알아차린 듯,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놈의 육중한 움직임에 낡은 터널이 흔들렸다. 주변에 숨어있던 강철 거미들이 수십 마리 튀어나와 진혁을 포위했다. 작은 놈들은 사냥개처럼 날뛰었고, 큰 놈들은 황야의 발톱의 움직임을 봉쇄하려는 듯 천천히 압박해 들어왔다.
“젠장, 함정이었나!”
진혁은 고함을 질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코어는 저 앞에 있었다. 그는 유압 클로를 단단히 쥐고 오른손으로 리피터를 조작했다. 목표는 강철 여왕의 센서, 즉 머리였다.
텅, 텅, 텅! 리피터가 불을 뿜었다. 거대한 탄환이 거미들을 꿰뚫고 여왕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여왕의 등껍질은 예상보다 훨씬 단단했다. 탄환이 튕겨 나갔고, 놈의 붉은 센서는 흔들림 없이 진혁을 주시했다.
쉬이이익! 강철 여왕의 등에서 날카로운 강철 가시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진혁은 황야의 발톱을 격렬하게 움직여 피했지만, 몇몇 가시들이 왼쪽 어깨 장갑에 박혔다. 콰앙! 스파크가 튀고 경고음이 울렸다.
“젠장, 뚫렸나!”
진혁은 조종간을 거칠게 꺾었다. 황야의 발톱이 지하 터널의 벽을 박차고 옆으로 회전하며 강철 거미 한 마리를 짓밟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정면 승부는 무모하다. 그는 빠르게 터널의 구조를 스캔했다. 오래된 지지대와 무너져 내린 잔해들. 이걸 이용해야 했다.
진혁은 황야의 발톱을 후진시켜 작은 거미 무리를 뚫고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강철 여왕과 그 졸개들이 그를 쫓아왔다. 터널은 점점 좁아지고 불규칙해졌다. 진혁은 리피터로 지지대 중 하나를 집중 사격했다. 텅, 텅, 텅! 지지대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며 뒤따라오던 거미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진혁은 강철 여왕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지금이다!”
그는 오른팔의 유압 클로를 전방으로 내밀고 가속했다. 황야의 발톱이 온 힘을 다해 돌진했다. 강철 여왕이 뒤늦게 반응하여 다리를 휘둘렀지만, 진혁은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을 피하며 놈의 옆구리에 클로를 박아 넣었다.
끼이이익! 거대한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강철 여왕의 두꺼운 갑옷판이 뜯겨져 나갔다. 놈은 고통스러운 기계음을 내며 몸부림쳤다. 진혁은 클로를 더욱 깊이 박아 넣으며 놈의 내부 구조를 헤집었다.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고, 끈적한 유압액이 뿜어져 나왔다.
“끝내주마, 이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
진혁은 클로를 최대한 벌려 놈의 약점, 내부의 제어 코어를 끄집어냈다. 강철 여왕의 움직임이 멎었다. 붉게 빛나던 센서가 서서히 꺼지고, 거대한 몸체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주변을 포위했던 강철 거미들도 우두머리를 잃자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흩어졌다. 진혁은 리피터로 남은 잔당들을 처리했다.
교전이 끝났다. 조용해진 터널에는 황야의 발톱의 거친 숨소리, 아니, 진혁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스크린에는 ‘시스템 데미지: 47%’라는 경고문이 선명했다. 왼쪽 어깨 장갑은 완전히 찌그러졌고, 유압 클로에도 날카로운 긁힘 자국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진혁은 메카를 움직여 강철 여왕의 잔해에서 거대한 마더 코어를 회수했다. 그리고 주변의 작은 거미 잔해들에서도 유효한 코어들을 최대한 수집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걱정 없이 움직일 수 있을 터였다.
그는 부서진 황야의 발톱을 이끌고 지하 통로를 벗어났다. 잿빛 대지 위로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먼지 가득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붉은빛은 마치 끝없는 생존의 여정을 비웃는 듯했다.
“젠장, 오늘도 겨우 살았군.”
진혁은 피곤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꺼지지 않는 생존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다음 날을 위해, 다시 싸울 준비를 하는 것. 그리고 황야의 발톱은 묵묵히 그 곁을 지켰다. 이 끝없는 생존의 드라마는, 오늘도 막을 내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