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2층, 김하연의 방은 밤에도 불이 환했다. 책상 위에는 수학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공허하게 창밖의 네온사인을 헤매고 있었다. 귓가에 맴도는 건 며칠째 계속되는 이상한 소리. 쿵, 쾅, 삐걱. 불규칙적이고 섬뜩한 소음은 층간소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기괴했다.
“하아, 또 시작이네.”
하연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명처럼 울리는 소리, 그리고 벽을 타고 전해지는 싸늘한 한기. 며칠 전부터 11층에 사는 박민희 씨 가족에게서 들려오던 소리였다. 처음엔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뭘 만드나 싶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별조각.’
목에 걸린 작은 펜던트가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하연은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평범한 일상은 사실 아주 오래전, 이 작은 조각을 손에 넣으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도시의 어둠 속에서 균열을 감지하고,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는 ‘환영결정의 마법소녀’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감각은 11층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엄마, 지훈이가 무섭대요… 자꾸 인형이 혼자 움직여요…”
낮에 마주친 민희 씨의 얼굴은 창백했다. 다섯 살배기 아들 지훈이는 엄마 뒤에 숨어 벌벌 떨었고, 민희 씨는 하연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녀는 관리사무소에 연락했고, 경찰에도 전화해봤지만, 그저 ‘원인 불명의 소음’이라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민희 씨?”
“네, 괜찮아요. 하연 씨는 괜찮으세요? 혹시 층간소음 때문에 시끄러우신 건 아니고요…?”
민희 씨는 눈에 띄게 초조해 보였다. 그녀의 손은 연신 치맛자락을 구겼고, 눈빛은 불안으로 흔들렸다. 하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혹시 불편한 점 있으시면 언제든 저한테 얘기해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하연은 돌아섰다. 그날 밤, 소음은 극에 달했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밤의 정적을 갈랐다. 뒤이어 들리는 민희 씨의 비명.
“안 돼! 지훈아, 거기 있으면 안 돼!”
하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범한 척은 이쯤에서 끝내야겠어.’
목걸이의 ‘별조각’ 펜던트가 그녀의 손바닥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환영결정의 인도 아래, 현실의 균열을 바로잡는 자. 김하연, 변신!”
섬광이 그녀의 방을 가득 채웠다. 낡은 잠옷은 순식간에 보석처럼 빛나는 결정 장식의 푸른색 코트로 바뀌었고, 머리에는 은색 장식이 달린 티아라가 얹혔다. 손에는 영롱한 푸른빛을 내는 지팡이가 쥐어졌다.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쾅! 쾅! 쾅!
아래층에서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하연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틈도 없었다.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어 11층으로 향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어둡고 기이한 기운이 피부를 훑었다. 문고리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민희 씨! 괜찮으세요?!”
하연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울먹이는 지훈이의 목소리와 민희 씨의 흐느낌, 그리고 무언가 부딪히고 깨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손에 쥔 지팡이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현실 고정!”
빛이 문고리를 감싸자, 차갑게 얼어붙었던 기운이 한순간 물러섰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안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거실의 소파는 천장으로 솟구쳐 매달려 있었고, 식탁의 의자들은 제멋대로 방 안을 굴러다니며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냉장고 문이 덜컥거리며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고, 진열장의 접시들은 공중에 뜬 채 위협적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엄마아아!”
“지훈아, 이리 와! 엄마한테 와!”
민희 씨는 지훈이를 끌어안고 벽에 바싹 붙어 있었다. 아이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낡은 곰 인형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그들의 주변을 으스스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인형의 유리 눈은 마치 살아있는 듯 하연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하연의 눈에 아파트 전체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왜곡’의 형체가 보였다. 11층을 중심으로,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현실을 빨아들이고 비틀어 버리는 어둡고 추악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형태가 없는 것이었지만, 너무나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러서!”
하연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푸른빛이 곰 인형을 강타하자, 인형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벽에 처박혔다. 유리의 파편이 튀었고, 인형은 찢어진 솜을 드러낸 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왜곡된 현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바닥의 마루는 파도처럼 울렁거렸고, 벽에서는 거미줄처럼 갈라진 틈새로 검은 안개가 새어 나왔다.
“민희 씨, 지훈이를 데리고 저쪽 방으로 들어가세요!”
하연은 민희 씨에게 소리쳤다. 민희 씨는 망설이는 듯했지만, 하연의 굳건한 눈빛에 이끌려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아이를 안고 방으로 향하는 동안, 하연은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환영결정, 현실의 균열을 봉합하라! 봉인의 벽!”
푸른빛이 폭발하며 거실 중앙을 중심으로 투명한 육각형의 결정 벽이 솟아올랐다. 결정 벽은 흔들리는 마루와 날아다니는 물건들을 일시적으로 가두었다. 하지만 벽은 계속해서 진동했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강해… 내가 상대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강력해. 이건 단순히 어딘가에 묶여있는 잔념이 아니야. 이 공간 자체를 잠식하려 들고 있어.’
하연은 지팡이를 단단히 쥐었다. 상대는 실체가 없었다. 어쩌면 이 아파트에 쌓인 수많은 사람들의 불안, 분노, 슬픔이 한데 뒤엉켜 만들어진 거대한 의념 덩어리일지도 몰랐다. 평범한 공간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 혹은 한 인간의 극한의 절망이 발현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왜곡’의 중심은 바로 거실 한가운데, 텅 비어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모든 기괴한 현상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화의 빛! 현실을 재건하라!”
하연은 지팡이 끝에서 모든 마력을 끌어모아 강력한 빛의 파동을 쏘아냈다. 푸른빛은 어둠을 갈랐고, 왜곡된 공간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쨍그랑! 결정 벽의 일부가 빛에 반응하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왜곡된 현실의 중심에서 끔찍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마치 수천 명이 동시에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비명 소리였다.
우르르 쾅쾅!
아파트 전체가 진동했다. 천장의 조명이 깜빡거리다 꺼졌다. 어둠 속에서 하연의 푸른빛만이 유일한 등불이 되어 빛났다. 그녀는 집중했다. 상대는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었다. 현실을 비틀고 있는 이 왜곡된 존재의 근원을 정화해야 했다.
“이곳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야! 네가 머물 곳이 아니야!”
하연의 목소리에 마력이 실렸다. 그녀는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지팡이를 더욱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왔고, 온몸의 결정 장식이 눈부시게 빛났다.
“환영결정의 마법소녀, 본래의 형태를 되찾는 노래를 부르노라! 현실 재구성!”
하연의 입에서 맑고 청아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목소리가 아니었다.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노래’였다. 노래의 파동이 거실의 왜곡된 공간을 향해 퍼져나갔다. 파동은 벽을 타고 흐느끼는 듯한 검은 안개를 걷어냈고, 공중에 떠 있던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천장으로 솟구쳤던 소파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안착했다.
하지만 왜곡의 중심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노래의 파동이 닿을 때마다 비명 소리는 더욱 격렬해졌고, 검은 안개는 하연의 주변을 휘감으며 그녀의 노래를 방해하려 들었다. 그녀의 몸은 마치 억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떨려왔다.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하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노래는 점차 절박해졌지만, 그만큼 강렬해졌다. 왜곡의 중심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쳐 오르며 하연을 덮치려 했다. 그 순간, 하연의 지팡이 끝에서 거대한 푸른 결정이 솟아났다. 결정은 검은 기운을 뚫고 왜곡의 중심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푸슈우우욱-!
마치 뜨거운 쇠가 찬물에 담기는 듯한 소리.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왜곡의 중심에서 나오던 비명 소리도 점차 희미해졌다. 하연의 노래는 마지막 음절에 이르렀고, 거대한 푸른 결정은 찬란한 빛을 내며 터져 버렸다.
파스스스…
빛이 사그라들자, 거실은 다시 평범한 아파트의 거실로 돌아왔다. 깨졌던 접시는 바닥에 나뒹굴고, 소파는 원래 자리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벽에 처박혔던 곰 인형은 찢어진 채 놓여 있었지만,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바닥의 마루는 더 이상 울렁거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왜곡’은 사라진 뒤였다.
하연은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고, 호흡은 가빴다.
덜컥.
민희 씨가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왔다. 지훈이는 엄마 품에서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민희 씨의 눈은 공포와 경외심이 뒤섞인 채 하연을 향했다. 그녀는 하연의 변신한 모습을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하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하연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녀의 변신은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보석 같은 옷은 다시 낡은 잠옷으로, 티아라는 사라지고 지팡이는 한 줌의 빛이 되어 소멸했다.
민희 씨는 하연에게 다가와 찢어진 곰 인형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그리고 하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말없이 하연을 일으켜 세웠다.
“저… 정말 고맙습니다.”
민희 씨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훈이를 한 번 더 꼭 안아주었다. 하연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민희 씨의 눈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본 듯한 미묘한 눈빛을 읽었지만, 그 이상의 질문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들은 보지 못할 때 가장 안전하고, 알지 못할 때 가장 편안했다.
아파트 12층, 김하연의 방. 밤은 깊었지만, 더 이상 아래층에서 이상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 속에서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었다. 모두가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알았다. 이 평범한 도시의 어딘가, 이 아파트의 다른 층, 혹은 이 거리의 다른 건물에서 또다시 현실의 균열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가 오면, 그녀는 다시 별조각 펜던트를 쥐고, 왜곡된 현실에 맞설 것이다. 오늘처럼, 그 모든 것을 짊어진 채. 혼자서.
오늘 밤, 이 도시의 어느 누구도 영웅의 등장을 알지 못했다. 오직 고요함만이 모든 것을 감싸 안았다. 고요함 속에서 하연은 다시 학생 김하연으로 돌아와 숙제를 다시 펼쳤다. 조용해진 아파트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은, 결코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