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보이지 않는 손님
늦은 밤, 1004호의 낡은 도어록이 삑, 하는 마른 소리를 내며 잠금 해제됐다. 김민준은 지친 몸을 이끌고 좁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회색빛 도시의 눅진한 공기가 그제야 조금은 물러나는 듯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켜지지 않은 스탠드 조명만이 창밖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흐릿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아…”
민준의 시선이 베란다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으로 향했다. 분명 오늘 아침 출근 전에 창문 바로 옆에 두었던 것 같은데, 화분은 테이블 한가운데로 옮겨져 있었다. 순간 멍하니 서서 기억을 더듬었다. 혹시 어제 밤늦게 물을 주다가 옮겨놓고 잊었나? 아니, 오늘은 화분에 물을 주는 날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제는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다.
‘착각이겠지.’
민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화분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피로가 낳은 일시적인 기억 혼란일 뿐이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시원하게 들이켰다.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때였다.
주방 싱크대 쪽에서 ‘슥, 탁’ 하는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가벼운 접시가 움직였다가 제자리에 놓이는 듯한 소리. 민준은 물병을 든 채 그대로 멈췄다.
“뭐지?”
누가 주방에 있는 것처럼 아주 선명했다. 하지만 이 아파트에 그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애완동물을 키우지도 않고, 동거인도 없다. 민준은 발소리를 죽인 채 주방으로 향했다. 불을 켤까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어둠 속에서 살펴보기로 했다.
싱크대 위는 깨끗했다. 방금 설거지를 끝낸 것처럼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식기 건조대에 걸려 있는 컵들도 가지런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도 없었다.
“이웃집 소리인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오래된 아파트는 층간 소음, 벽간 소음이 심했다. 옆집에서 작은 물건이라도 떨어뜨리면 천둥 치는 소리로 들릴 때도 있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던졌다. 하루 종일 뭉쳤던 어깨 근육이 축 처지는 듯했다. 눈을 감고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는 순간,
*쿵!*
이번에는 훨씬 크고 선명한 소리였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소리는 침실에서 났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침실 문은 분명히 닫혀 있었다. 그가 집을 나설 때도, 돌아와서도 한 번도 열지 않았다.
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침입자일까? 하지만 10층 높이의 아파트에 침입자가 들어올 리는 만무했다. 도어록도 견고했다. 그는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떨려 비상 전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일단 확인해야 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소리가 텅 빈 거실에 불협화음처럼 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침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어둠이 마치 거대한 입처럼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차가웠다. 망설이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을 활짝 열었다.
“흐읍!”
짧은 비명과 함께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실 안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한 가지는 확실히 보였다. 침대 머리맡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유리 조각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고, 프레임은 깨져 있었다. 액자 속, 행복하게 웃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민준은 그 액자를 결혼기념일 선물로 직접 골라 걸어두었다. 튼튼한 못을 박아 고정했고, 매일 아침 출근 전에도 멀쩡히 벽에 붙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는 홀린 듯이 깨진 액자로 다가갔다. 심장이 발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액자를 주워 들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순간,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확 끼쳐왔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목덜미에 차가운 숨을 불어넣는 듯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끼이이이익…*
침실 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문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닫히는 문틈 사이로 거실의 희미한 불빛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순식간에 침실 안은 완전한 암흑에 잠겼다. 민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 누구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절규에 가까웠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침실 안에서 무언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드르륵…’ 침대 프레임을 긁는 소리 같기도, 벽지를 찢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민준은 팔을 휘저으며 겨우 침대 옆 협탁을 더듬었다. 휴대폰… 휴대폰!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을 켜자, 밝은 빛이 침실의 일부를 비췄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시트 위로 솟아오른 기괴한 형상이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움푹 패이고, 그 위로 마치 누군가 숨어 있는 것처럼 시트가 솟아올랐다.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민준의 시선이 닿는 순간, 시트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트리스가 눌린 채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침대 위를 기어오는 듯했다.
“흐읍! 으아악!”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밝은 화면이 바닥에 나뒹굴며 시트 위의 그림자를 더 기괴하게 만들었다. 그는 뒤로 넘어지며 벽에 부딪혔다. 차가운 벽에 등골이 닿자 소름이 돋았다. 보이지 않는 형체가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발치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휘감았다.
그때였다.
방금까지 희미하게나마 불을 비추던 휴대폰 화면이 ‘픽’ 소리를 내며 꺼졌다. 완벽한 암흑. 사방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긁는 소리와, 그의 발목을 휘감는 듯한 차가운 기운. 민준은 미친 듯이 벽을 기어 침실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을 열어야 했다.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문손잡이가 닿는 순간, 그의 귀에 속삭임이 들렸다.
*”…민…준…”*
그의 이름이었다. 굵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 바로 귀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민준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팔에 소름이 돋으며 털이 쭈뼛 섰다.
*”…왔…어…”*
또 한 번의 속삭임. 이번엔 더욱 길게 늘어지는 소리였다. 마치 혀로 그의 귓불을 핥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의 손을 잡고 있던 문손잡이가 아래로, 아래로, 서서히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기 위한 문이, 안에서 잠기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