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고, 숲은 고요했다. 달빛이 촘촘한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내려와, 마치 은빛 비늘을 뿌려놓은 듯 땅 위를 어슴푸레하게 밝혔다. 류진은 낡은 석탑의 부서진 벽에 기대어 가만히 숨을 죽였다. 코끝을 스치는 습한 흙냄새와 이름 모를 풀꽃 향기가 묘하게 뒤섞여, 그의 심장을 조용히 두드렸다. 이곳, 인간들이 ‘저주받은 숲’이라 부르며 한 발짝도 들이려 하지 않는 금기의 땅은, 그에게는 오히려 가장 평화로운 안식처였다.
그의 눈은 희미한 달빛 속을 꿰뚫듯 숲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곳에서, 그녀가 나타날 터였다. 인간의 세상에서 윤리라는 이름으로 죄악시되는 그의 사랑. 종족을 넘어선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비난과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진은 단 한 번도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흐릿해진 이 이세계에서, 에리엘은 그의 유일한 등불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정적 속에서, 멀리서 아주 작고 영롱한 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숲의 어둠이 형체를 이루듯 부드럽게 움직이며 한 존재가 나타났다. 길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카락은 달빛을 머금어 신비로운 광채를 뿜어냈고, 밤하늘을 닮은 검푸른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담고 있는 듯 아련했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했으며, 가는 허리에 매달린 잎사귀 장식만이 그녀가 숲의 일부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림자 요정, 에리엘이었다.
그녀의 발소리는 마치 낙엽 위를 걷는 이슬처럼 가볍고 조용했다. 류진의 눈과 마주치자, 그녀의 늘 슬픔에 잠겨있던 눈동자에 비로소 작은 빛이 스며들었다.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류진.”
그녀의 목소리는 숲을 스치는 바람처럼 부드러웠으나, 듣는 이의 마음을 아련하게 흔드는 특유의 애잔함이 있었다. 류진은 그녀를 향해 다가가 두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의 손은 늘 그랬듯, 만질 때마다 그의 심장을 아프게 했다. 그녀의 종족은 ‘냉기의 피’를 지녔다고 알려져 있었다.
“괜찮아, 에리엘. 설마 약속을 어길 리가 없잖나.”
류진은 그녀의 차가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의 따스한 온기가 그녀의 피부에 닿자, 에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늘도 위험했어요. 순찰대가 숲 가장자리까지 다가왔더군요. 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밤의 그림자’라 부르며 저주하고 있어요.”
에리엘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종족은 인간들에게 잊혀진 저주받은 숲의 심연에 숨어 살고 있었지만, 인간들의 탐욕은 늘 그들의 경계를 넘보고 있었다. 류진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꽉 잡으며 위로하듯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쓸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넌 안전해. 내가 옆에 있잖아.”
“류진…”
에리엘은 고개를 들어 류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그 어떤 전설 속 영웅보다도 강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차가운 몸에 류진의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하는 듯했다.
“인간의 도시에서 당신이 보낸 편지를 받았어요. ‘금지의 장벽을 넘어선 사랑은 파멸을 부른다’는 내용이었죠. 숲의 장로님들도 이 관계를 걱정하세요. 어쩌면… 우리가 너무 위험한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에 류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장로들이 보냈을 그 경고문은, 아마 숲 밖의 인간 사회에서도 알게 모르게 전해지는 금기와 다를 바 없으리라. 종족을 넘어선 사랑은 그 자체로 존재 자체가 모순이며, 세상의 균형을 해친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
“파멸이라니?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어째서 파멸을 부른단 말인가? 그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낡은 편견일 뿐이야.”
류진의 목소리에는 격정이 실려 있었다. 그는 에리엘의 두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손길이 닿자, 에리엘의 창백한 뺨에 아주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돌았다.
“나는 네가 두려워하는 그 ‘어둠의 요정’이 아니야. 그저 에리엘일 뿐이야. 네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봤어. 편견에 물들지 않은 네 영혼은 이 숲의 그 어떤 빛보다도 눈부셨지.”
에리엘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류진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차가운 몸이 류진의 따스한 체온에 조금씩 녹아드는 듯했다. 류진은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숲의 향기와 에리엘의 은은한 향기가 뒤섞여 그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류진.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에리엘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류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속삭임은 류진의 마음속 깊이 박혀 있던 모든 불안감을 씻어내는 듯했다. 그는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 품 안에서만큼은, 어떤 금기도, 어떤 편견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숲의 어둠을 가르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사냥개의 짖는 소리.
“인간들이… 여기까지.”
에리엘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류진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류진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도망칠 생각 마. 이젠 내가 널 지킬 차례니까.”
그는 에리엘의 손을 잡고 몸을 숙여 석탑의 그늘진 틈새로 숨어들었다. 쿵, 쿵, 쿵.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사냥개의 짖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류진은 에리엘의 차가운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이 밤이 끝나면, 과연 자신들의 금지된 사랑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그들의 심장은 같은 박자로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서로의 온기만이 그들을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