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스릴러 독립적인 단편 소설

이지훈은 자신의 아파트를 사랑했다. 햇살이 잘 드는 남향의 거실, 적당히 넓은 창밖으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벽과 미니멀한 가구들로 채워진 공간은 완벽한 휴식처이자 작업실이었다.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대부분의 시간을 이 평화로운 공간에서 보냈다.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잔잔하게 틀면, 세상의 번잡함은 먼 다른 행성의 이야기 같았다.

어느 날부터였다. 분명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차 키가 현관 선반 위에서 발견되거나, 어제 밤 분명 침대 옆에 두었던 리모컨이 소파 쿠션 밑에서 튀어나오는 식의 자잘한 일들. 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피곤해서 그랬겠지.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나.’ 스스로에게 투덜거리며 그는 기억력 앱을 설치했다. 하지만 앱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점점 빈도가 잦아졌다. 꽂아두었던 책 한 권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분명 잠갔던 화장실 문이 스르륵 열려 있는 모습. 처음엔 바람 탓을 했다. 환기시키려고 창문을 열어둔 걸 깜빡했나? 아니면 건물이 오래돼서 저절로 문이 움직이는 건가? 하지만 그의 아파트는 지은 지 5년도 채 안 된 신축 건물이었다. 모든 것이 새것이었다. 그리고 바람이 통하지 않는 안방의 문이 스르륵 열리는 건 설명할 수 없었다.

밤에는 더 심해졌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벽 저편에서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드르륵.’ 마치 손톱으로 거친 벽을 긁는 듯한. 처음엔 옆집 소리겠거니 했다. 하지만 소리는 매번 같은 벽, 그의 침대 머리맡에서 나는 듯했다. 옆집의 벽과 자신의 벽은 공유되지 않는 구조였다. 단단한 콘크리트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점차 리듬을 타는 듯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점점 지훈의 평온한 일상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런데도 피부가 닭살처럼 돋아났다.

“누구… 없어요?” 지훈은 텅 빈 공간에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았다. 돌아오는 건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뿐이었다.

그 후로는 물건들이 눈앞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놓아두었던 펜이 스르륵, 하고 가장자리로 밀려나더니 ‘똑’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훈은 얼어붙었다.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보았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거실 구석에 삼각대를 세워두고 하루 종일 녹화했다. 처음 며칠은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 그저 텅 빈 공간과 무의미한 시간들뿐. 지훈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미쳤나 봐. 스트레스가 심해서 환각까지 보나.’

하지만 며칠 뒤, 그는 충격적인 장면을 발견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탁자 위에 놓인 머그컵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영상이었다. 마치 누군가 아주 살짝 건드린 것처럼. 화면 속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지훈은 영상을 확대하고 또 확대했다. 분명히, 움직였다. 미세했지만, 움직였다.

그날 밤부터 지훈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파트 전체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모든 소리가 예민하게 다가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 위층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심지어는 냉장고의 미세한 진동까지도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집이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대체… 누구세요?” 지훈은 또다시 텅 빈 거실에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기 자체가 차갑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코끝이 시릴 정도로 싸늘한 기운. 그는 몸을 움츠렸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지훈은 자신의 침대 시트 위에서 섬뜩한 것을 발견했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남겨진 손자국. 마치 누군가 젖은 손으로 눌렀다가 사라진 듯한 자국이었다. 손바닥 자국 주위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도 선명했다. 자신의 손 크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훨씬 작고 얇은 손이었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지훈은 친구들에게 하소연했지만, 모두 그저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고립되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탕, 하고 거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실로 달려가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남은 이성을 산산조각 냈다.

거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유리 화병이 바닥에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 안의 물과 꽃잎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화병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안정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건… 아니야.”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건… 당신 짓이지? 나랑 장난하는 거야?”

그 순간, 주방에서 칼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다음 순간, 냉장고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닫혔다. 불이 번쩍번쩍 깜빡이더니, 급기야 거실 전체가 암전되었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그는 무언가의 시선이 자신을 뚫어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등 뒤에서 싸늘한 숨결이 느껴졌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겹쳐지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내달렸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현관문을 찾아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미친 듯이 문고리를 돌렸다.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문을 활짝 열고 뛰쳐나갔다.

복도로 뛰쳐나온 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등 뒤로 아파트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빛 한 점 없는 그의 집. 그곳은 이제 더 이상 그의 집이 아니었다.

지훈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그의 뇌리에는 희미한 손자국, 깨진 유리 파편, 그리고 귓가를 맴돌던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만이 가득했다. 그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결국 그 아파트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 공간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 공간은 다른 누군가에게, 혹은 다른 무언가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듯했다.

얼마 후, 그 아파트는 새로운 세입자를 맞이했다. 물론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밤이 깊어지면 그 아파트의 거실에서,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과 함께 펜 하나가 스르륵, 테이블 끝으로 밀려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운 것은, 언제나 묘한 침묵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