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물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 먼지가 모든 것을 덮었다. 한때 푸른 빛을 머금었을 세상은 이제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무채색이었다. 태양은 병든 노인의 눈처럼 붉고 흐릿하게 허공에 걸려 있었고, 그마저도 짙은 먼지구름 뒤에 숨어 제 온기를 제대로 내리지 못했다.

강태는 무너진 고층 빌딩의 잔해 사이에서 몸을 웅크렸다. 등 뒤로는 어린 동생 수아가 파묻힌 담요를 더욱 바싹 끌어당기며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며칠 전 발견한 오래된 군용 텐트 덕분에 차가운 밤공기에서 겨우 버티고 있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형아, 다 왔어?” 수아의 목소리가 담요 속에서 웅얼거렸다. 잠결에도 불안이 서려 있었다.

강태는 작은 손을 뻗어 담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니, 아직 멀었어. 하지만 괜찮아. 형아가 지켜줄게.”

그 말은 그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강철심장’이라 불리던 도시의 흔적을 밟으며 북쪽으로 향한 지도 없는 여정. 낡은 지도는 몇십 년 전의 세상만을 기억했고, 지금 그들이 발 디딘 곳은 지옥이었다. 세계를 뒤흔든 ‘뒤틀림의 밤’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땅은 갈라지고 하늘은 찢어졌으며, 인간은 더 이상 세상의 주인이 아니었다.

텐트 밖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태는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낡은 총에 손을 얹었다. 녹이 슬어 제 색깔을 잃은 총이었지만, 그의 손에선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로웠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설마… 벌써?’

“쉬이.” 강태는 수아에게 속삭였다. 수아는 토끼처럼 눈을 떴고, 강태의 눈빛에서 위험을 읽었는지 작은 몸을 더욱 웅크렸다.

소리는 텐트 주변을 맴돌았다. 금속 조각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 낮은 으르렁거림.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강태는 총의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며 텐트 한쪽 모퉁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뿌연 먼지 때문에 시야는 고작 몇 걸음에 불과했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번쩍였다. 거대한 몸집의 그림자가 텐트의 희미한 윤곽을 맴돌고 있었다. ‘그림자 사냥꾼’. ‘뒤틀림의 밤’ 이후 나타난 변이종 중 가장 악독한 녀석 중 하나였다. 낮에는 바위처럼 위장하고 밤에만 움직이는 이 피에 굶주린 짐승은, 인간을 최상의 먹잇감으로 여겼다.

강태의 손에 땀이 배어났다. 탄약은 서너 발밖에 남지 않았다. 도망칠 수도, 맞설 수도 없는 상황. 그 순간, 수아가 텐트 안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아… 무서워…”

수아의 목소리는 그림자 사냥꾼에게 들렸다.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더욱 거세졌다. 텐트가 찢어질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강태는 이를 악물었다. ‘안 돼. 수아는 내가 지켜야 해.’

그는 눈을 감고,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텐트를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리 와! 이 괴물 자식아!”

짐승은 강태의 도발에 반응했다. 그의 존재를 인지한 그림자 사냥꾼이 방향을 틀어 강태를 향해 덮쳐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짐승의 거대한 발톱이 번뜩였다. 강태는 몸을 날려 피했고, 총을 들어 심장을 겨냥했다. 탕! 낡은 총이 허공을 갈랐지만, 짐승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젠장!” 강태는 재빨리 건물 잔해 뒤로 숨었다. 짐승은 그의 냄새를 쫓아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강태는 도망치는 대신, 지형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정면 승부는 무모했다.

그는 옆에 떨어져 있던 녹슨 철근을 집어 들고, 짐승의 움직임을 살폈다. 녀석은 강태가 숨은 잔해 주변을 돌며 틈을 노리고 있었다. 강태는 녀석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모든 변이종들은 약점이 있었다. 그림자 사냥꾼의 약점은 눈. 붉게 빛나는 눈만이 유일한 약점이었다.

수아가 텐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형아!”

“수아! 들어가 있어!” 강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짐승이 수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강태는 이성을 잃었다. 어린 동생을 노리는 짐승의 시선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는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짐승의 옆구리를 향해 철근을 내리찍었다. 콰앙! 금속성 소리가 났다. 짐승은 잠시 비틀거렸지만, 이내 강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짐승의 거대한 앞발이 강태의 어깨를 강타했다.

“크아악!” 강태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어깨에서부터 불타는 듯한 통증이 퍼져나갔다.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그의 눈은 짐승의 붉은 눈을 놓치지 않았다.

짐승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강태는 허리춤에 남은 마지막 탄약을 손에 쥐었다. 탄창이 아닌, 주머니 속에 따로 넣어둔 비상용 탄환이었다. 그는 고통을 억누르며 몸을 일으켰고, 짐승이 앞발을 내리찍는 찰나, 망설임 없이 손에 든 탄환을 짐승의 눈에 던졌다.

탄환은 정확히 짐승의 눈에 박혔다. 짐승은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몸부림쳤다. 붉은 눈 하나가 터져 피와 검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완전히 무력화된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강태는 이를 악물고, 아까 주워 든 철근을 녀석의 다른 쪽 눈에 박아 넣었다. 퍽! 짐승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두 번째 눈마저 파괴되자, 녀석은 방향을 잃고 주변의 잔해를 들이받으며 쓰러졌다. 이내 거친 경련과 함께 움직임을 멈췄다.

모든 것이 끝나자, 강태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어깨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숨이 가빴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수아를 찾았다.

수아는 텐트 밖에 나와 강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얼굴은 눈물과 먼지로 범벅되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을 향한 안도감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강태에게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형아, 괜찮아?” 수아의 작은 손이 강태의 상처 입은 어깨에 닿았다. 강태는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괜찮아, 수아. 괜찮아. 다 끝났어.”

어둠 속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울음소리가 다시금 폐허의 적막을 깨트렸다. 아직 밤은 길었고,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었다. ‘녹색 지대’라는 희망은 여전히 아득했지만, 강태는 알았다. 옆에 있는 작은 생명 때문에라도, 그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강태는 수아의 손을 잡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먼지구름 사이로 희미한 별 몇 개가 마치 자신들을 응원하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부러졌을지라도, 그의 의지는 부러지지 않았다.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뜨고,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은.

“자, 수아. 다시 가자.” 강태는 겨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쉬어가려면 아직 멀었어.”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태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들의 그림자가 폐허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또 다른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