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게임 (VRMMO) 독립적인 단편 소설

새벽 2시, 모니터 불빛만이 유일한 등대가 되어 어둠에 잠긴 방을 비추었다. 강진우는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을 잠시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액정 속에는 ‘레거시 오브 아레스’의 가장 깊고 음침한 던전, ‘나락의 심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그의 캐릭터 ‘나이트폴’은 검은 갑옷을 두른 채 핏빛 마수를 든든하게 쥐고 있었다.

“진우야, 이 패턴 진짜 역겹네. 네 말대로 미리 광역 디버프부터 끊어야 해.”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이현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경쾌했다. 그의 캐릭터 ‘선샤인’은 화려한 성직자 로브를 입고 진우의 바로 뒤에서 묵묵히 버프를 걸고 있었다. 녀석과 진우는 고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닌 끔찍한 단짝이었다. 현실에서 쌓지 못한 끈끈한 유대감을 이 가상현실 속에서 쌓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함께 게임을 시작하고, 함께 길드를 만들고, 함께 밤을 새워가며 최고 레이드를 공략했다. ‘여명의 파수꾼’ 길드는 이제 ‘레거시 오브 아레스’ 서버에서 가장 강력한 길드로 손꼽혔고, 그 정점에 진우와 현재가 있었다. 진우는 길드의 메인 딜러이자 전략가였고, 현재는 진우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완벽한 보조이자 길드 마스터였다.

“걱정 마. 내가 어그로 다 끌고 있을 테니까 넌 힐이랑 정화만 잘 넣어줘.”

진우는 차분하게 지시했고, 현재는 “알았어, 믿고 있어!” 하고 웃었다. 거대한 마족의 심장이 꿈틀거리는 보스 몬스터, ‘나락의 군주’와의 마지막 페이즈가 시작되었다. 진우는 번개처럼 움직이며 보스의 공격을 회피했고, 동시에 치명적인 스킬을 퍼부었다. 현재의 버프와 힐은 절묘한 타이밍에 진우의 생존력을 극대화했다. 길드원들의 함성 속에서, 마침내 나락의 군주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전 서버 최초 클리어!’

화려한 공지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환호했고, 축하 메시지가 빗발쳤다. 현재는 진우에게 달려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봤지? 우리가 해냈어! 역시 너 없인 안 돼, 진우야!”

그때까지만 해도 진우는 현재의 눈빛에서 거짓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달콤한 성공의 밤이 끝나고, 며칠 뒤 현실에서의 현재는 진우를 찾아와 맥주 한잔을 건넸다.

“진우야, 길드 재정 문제 말인데. 이번에 서버 통합 준비하면서 새로운 장비들을 좀 맞춰야 하잖아?”

“응, 그래서? 네가 다 알아서 하고 있잖아.”

“아니, 그게… 이번에 길드 자산을 한데 모아서 투자를 좀 해볼까 해. 더 큰 규모로, 우리 길드를 아레스 서버 통합 최강으로 만들려면 지금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어.”

진우는 현재의 제안에 잠시 망설였다. 길드 자금은 수많은 길드원들이 피땀 흘려 모은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항상 신중하고, 길드를 누구보다 아끼는 녀석이었다.

“네가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어. 대신, 투명하게 진행하고 길드원들한테 설명 잘 해줘.”

진우는 현재를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얼마나 처참한 비수가 되어 돌아올지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며칠 후, 길드 게시판에는 충격적인 공지가 올라왔다.

[긴급 공지: 길드 마스터 이현재 님의 발표]
‘여명의 파수꾼’ 길드는 새로운 길드 마스터인 ‘선샤인’(이현재) 님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합니다. 길드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또한, 기존 메인 딜러 ‘나이트폴’(강진우) 님은 개인 사정으로 인해 길드를 탈퇴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진우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게시판에는 자신의 이름이 마치 배신자인 양 적혀 있었고, 그의 길드 탈퇴는 기정사실처럼 공지되어 있었다. 그는 당장 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현재야? 내가 탈퇴했다고? 지금 농담하는 거지?”

수화기 너머의 현재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농담? 진우야, 이제 너는 우리 길드에 필요 없어. 네가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조치한 거야.”

“뭐? 필요 없어? 우리가 같이 쌓아 올린 건데, 갑자기 이게 무슨… 길드 자금은? 서버 통합 준비는?”

“아, 그거? 그거 다 내 명의로 옮겼어. 네가 전략을 잘 짜는 건 인정하지만, 정작 길드를 운영하고 투자하는 건 나잖아? 그리고 너, 현실에서 하는 일도 변변치 않아서 게임에 너무 의존하는 것 같더라. 내가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

진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투자라니, 투명한 운영이라니. 전부 거짓말이었다. 현재는 진우가 게임에 모든 것을 바치는 동안, 그의 등 뒤에서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긴. 나도 내 인생이 있고, 내 미래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네가 없어도 ‘여명의 파수꾼’은 잘 돌아갈 거야. 아니, 어쩌면 더 잘 될 수도 있지.”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진우는 손에 든 스마트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캐릭터, ‘나이트폴’은 이제 길드 소속이 아니었다. 길드 자금은 물론, 그가 게임을 하며 쌓아 올렸던 명성까지 모두 현재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현재가 보란 듯이 길드를 재편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광경이었다.

“강진우, 그는 게임에만 매달리던 한심한 녀석이었어.”
“선샤인님이 다 했지, 나이트폴은 그저 기생충 같은 존재였어.”

그의 귀에 들려오는 비난의 목소리들은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갈랐다. 배신감과 모욕감, 그리고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처절한 절망감이 그를 덮쳤다.

며칠 밤낮을 술과 담배에 절어 지냈다. 모니터 속 ‘레거시 오브 아레스’는 여전히 활기찼지만, 그 안에는 더 이상 진우의 자리가 없었다. 캐릭터 창을 열어본다. 텅 비어버린 길드 마크, 쓸쓸하게 남은 장비들. 이 모든 것을 현재가 한순간에 앗아갔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그때, 진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끝이라고? 아니, 이게 진짜 시작이야.’

그의 절망은 이내 불타는 분노로 변했다. 복수심이 그의 심장을 송곳처럼 꿰뚫었다. 현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만큼, 그 녀석의 모든 것을 되갚아 주리라.

진우는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나이트폴’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로. 닉네임은 ‘쉐도우 스토커’. 그는 가장 비주류이자 가장 난이도 높은 클래스로 알려진 ‘그림자 사냥꾼’을 선택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오직 그림자 속에서만 존재하는 은밀한 암살자.

“현재… 네가 나를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으니, 그 그림자가 너를 집어삼키게 될 거야.”

진우는 서버 구석의 가장 작은 마을에서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철저히 혼자였다. 길드도, 친구도,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오직 복수라는 목표만이 그를 이끌었다.

그는 미친 듯이 게임을 파고들었다. 과거 길드 전략을 짜던 분석력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림자 사냥꾼’의 숨겨진 잠재력, 비주류 스킬들의 연계,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사냥터 효율. 진우는 이 모든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습득하고 체득했다. 현실의 고통과 좌절은 가상현실 속에서의 집중력을 극대화하는 연료가 되었다.

현재가 운영하는 ‘여명의 파수꾼’ 길드는 서버 통합 최강을 목표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새로운 길드 마스터로서 현재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군림했다. 진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복수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몇 달 후.
‘레거시 오브 아레스’에는 새로운 강자가 출현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길드도 없이, 파티 플레이도 거의 하지 않는 의문의 ‘쉐도우 스토커’라는 유저였다. 그는 보스 몬스터의 솔로 킬 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웠고, 길드 전쟁에서는 홀로 수십 명의 길드원을 암살하며 전장을 교란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아무도 몰랐다.

“젠장, 저 ‘쉐도우 스토커’라는 놈은 대체 뭐야? 길드 전쟁에서 우리 길드원만 몇 명을 날려 버린 거야?”

현재는 길드 마스터로서 점차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쉐도우 스토커는 특정 길드만을 노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 길드가 바로 ‘여명의 파수꾼’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저 라이벌 길드의 사주를 받은 고용 암살자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레거시 오브 아레스’의 최대 길드 이벤트, ‘영광의 전당’ 레이드 개막이 선포되었다. 서버 통합 후 최초로 열리는 대규모 레이드로, 보상은 물론 명예까지 거머쥘 수 있는 기회였다. 현재의 ‘여명의 파수꾼’은 당연히 이 레이드의 선두주자였다.

레이드 시작일, 현재는 잔뜩 들뜬 표정으로 길드원들을 독려했다.

“모두 집중해! ‘영광의 전당’은 우리 ‘여명의 파수꾼’의 것이다!”

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현재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채팅창을 확인했다. 그 순간, 길드원들의 비명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쉐도우 스토커’ 님이 ‘영광의 전당’ 레이드 보스 ‘시간의 지배자 크로노스’를 선점했습니다!]
[‘쉐도우 스토커’ 님이 ‘시간의 지배자 크로노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현재는 눈을 의심했다. ‘선점’? 레이드 보스는 수십 명의 길드원이 함께 공략해야 하는 난이도였다. 그런데 ‘쉐도우 스토커’ 혼자서 선점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 레이드 전장에 그림자처럼 나타난 한 인물이 있었다. 검은 두건을 깊게 눌러쓴 그는 현재의 눈앞에서 보스의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쉐도우 스토커’ 님이 ‘시간의 지배자 크로노스’를 처치했습니다!]
[‘전 서버 최초 솔로 클리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전 서버에 공지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길드원들은 물론, 현재까지도 충격에 휩싸였다. 현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 쉐도우 스토커! 대체 정체가 뭐야? 어째서 매번 우리 길드를 방해하는 거지?”

쉐도우 스토커는 현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냉기가 서린 진우의 얼굴이었다. 그의 눈은 복수심으로 이글거렸다.

“현재… 나를 알아보겠어?”

현재의 얼굴은 핏기가 가셨다. 그 목소리, 그 눈빛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진… 진우? 설마… 네가… 나이트폴이었다고?”

“그래. 네가 버렸던 나이트폴이다. 네가 나를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지. 그리고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너를 집어삼킬 힘을 길렀어.”

진우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현재는 뒷걸음질 쳤다. 그가 비웃었던, 게임밖에 모르던 한심한 녀석이 상상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가 있어?”

“네가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갔을 때, 나는 깨달았다. 너 같은 놈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네가 없어도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진우는 현재의 길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 그림자 마법이 뿜어져 나왔다.

“이현재.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갔던 모든 것을 돌려받을 시간이야.”

진우의 그림자 마법은 ‘여명의 파수꾼’ 길드원들을 덮쳤고, 그들의 생명력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현재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길드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그의 명예는 진우의 손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아니야… 이러지 마… 진우야… 제발…”

현재의 처절한 외침은 진우의 귀에 닿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나이트폴’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현재가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복수심만이 남아있었다.

“네가 나에게 안겨주었던 절망을, 이제 네가 맛볼 시간이다. 잘 가라, 이현재.”

진우는 마지막 그림자 칼날을 현재의 캐릭터에 꽂았다. 현재의 캐릭터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고, 그 위에 진우의 ‘쉐도우 스토커’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영광의 전당’ 레이드 보스 방은 정적에 휩싸였다. 진우는 차가운 시선으로 쓰러진 현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복수는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통쾌함 대신, 알 수 없는 공허함만이 남았다. 이 모든 복수가 끝나고 나면, 그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할까. 진우는 미련 없이 레이드 존을 떠났다. 그의 그림자는 더욱 깊어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