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비무제의 결승전.
거대한 비무장은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만 관중의 숨소리마저 얼어붙은 듯, 고요가 깊은 바닥 없는 호수처럼 비무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새벽녘,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멀리서 보면 마치 먹물을 푼 듯한 수묵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 안개 속에서 두 그림자가 마주 보고 섰다. 천하의 운명을 건 마지막 대결.
이환은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애써 무시했다. 명경지수 같던 마음은 비무장에 오르기 직전부터 작은 파문으로 일렁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폭풍전야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눈앞의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은 그의 의지를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권진산.
그는 이름만으로도 천하를 떨게 하는 존재였다. 모든 무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신(武神)’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유일한 사내. 백발이 성성한 노구였지만, 그의 두 눈은 깊은 심연처럼 끝을 알 수 없는 기파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단지 서 있을 뿐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수천의 칼날이 동시에 이환의 정신을 겨누는 것보다 더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결승전 시작!”
심판의 쉰 목소리가 비무장에 쩌렁쩌렁 울렸지만, 그 소리는 이환의 귓속에서 한 줌의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은 오직 권진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권진산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한, 혹은 어린아이의 장난을 지켜보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 미소는 이환의 내면에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을 심어주었다.
“이환.”
권진산의 목소리가 고요한 비무장을 나직이 갈랐다. 우레와 같지도, 낭랑하지도 않았지만, 그 음성은 이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직접 울리는 듯했다.
“자네는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섰는가?”
이환은 순간 주춤했다. 대답은 이미 마음속에 수도 없이 되뇌었던 것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천하의 평화를 위해… 약자를 수호하고, 무림의 대의를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비록 조금 흔들렸을지언정, 그의 신념은 굳건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권진산의 입꼬리가 더욱 희미하게 비틀렸다. 그 미소는 조롱 같았다.
“허세로군. 얄팍한 신념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법이다. 과연 그 신념이… 이 천하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진산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마치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듯, 그는 이미 이환의 눈앞에 있었다. 섬광처럼 번개처럼 빠르다기보다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이동이었다.
이환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올렸다. 칼날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권진산을 겨냥했다. 청풍검법(淸風劍法) 제1식,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드는 한 수였다. 그러나 권진산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그저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퍼억!
묵직한 충격과 함께 이환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권진산의 손바닥이 정확히 검날의 한가운데를 잡아채고 있었다. 맨손으로 날카로운 검날을 잡았음에도, 그의 손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검날 자체가 권진산의 손바닥에 짓눌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리석군.”
권진산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 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대의를 부르짖으며 칼을 휘두르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들 모두 피를 보고 죽어갔지. 피로 피를 씻는다는 미명 아래, 결국 모든 것이 피로 물들었을 뿐이다.”
그의 말이 이환의 귓전을 때렸다. 순간, 이환의 머릿속에 혼란이 피어났다. ‘피로 피를 씻는다는 미명 아래…’ 과거 무림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비극적인 진실이었다. 그 모든 전쟁과 유혈 사태를 정당화했던 명분들. 그의 스승 또한 항상 대의를 외치며 수많은 싸움에 나섰고, 그 결과…
권진산이 검날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이환의 검이 파르르 떨렸다. 금속성 비명 소리가 비무장 전체를 울렸다. 그리고 기어이, 그의 검이 손안에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쨍그랑!
명검(名劍) 청풍검이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환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손에 익숙했던, 그의 혼과 같았던 검이 이렇게 허무하게 파괴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리석은 아이여. 너의 정의는 너무나 연약하구나.”
권진산은 조각난 검 파편들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이환의 눈동자에 박혔다.
“모든 인간은 욕망을 가진다. 그리고 그 욕망이 부딪히는 곳에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기지. 네가 말하는 ‘평화’는 그 욕망을 억누르는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다.”
이환은 뒷걸음질 쳤다. 권진산의 말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깊이 박힌 뿌리들을 흔드는 독기 어린 칼날과도 같았다.
“너는 네가 딛고 선 이 비무장이, 그리고 네가 지키려 하는 이 천하가, 과연 ‘정의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권진산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마치 그의 속삭임이 이환의 심연을 들춰내는 듯했다.
“진정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려 했다면, 이딴 유치한 비무 같은 걸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지. 너의 스승이 그랬듯, 너 역시 그저 누군가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눈을 떠라, 이환. 네가 믿는 모든 것이 거짓일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말과 함께, 권진산은 갑자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떠한 공격도, 어떠한 무공도 펼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그 후퇴는 오히려 이환의 정신에 더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치 이환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견고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 냉기가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환은 무너진 검 파편과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자신이 왜 여기에 서 있는지, 무엇을 위해 싸워왔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눈앞에는 더 이상 무신 권진산이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입을 벌리고 그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대결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