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시니가 내려앉은 뒷골목, 오래된 여관 지하의 퀴퀴한 냄새가 맴도는 곳. 낡은 탁자 위에는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탁자 한쪽엔 훈련용 단검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고, 다른 쪽엔 다 마신 술병과 꾸깃꾸깃한 종잇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아는 촛불 불빛 아래에서 낡은 지도 한 장을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연신 탁자를 두드렸다. 그녀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카이. 이대로 가다간 정말 다 굶어 죽을 판이라고.”
맞은편에 앉은 카이는 턱을 괴고 있었다. 닳고 닳은 가죽 조끼를 걸친 그의 모습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그는 들고 있던 빵 부스러기를 입에 털어 넣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매번 하던 소리잖아. 제국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거라 기대했나?”
시아는 울컥하며 지도를 손으로 쓸어버렸다. 종잇조각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자비? 그자들이 자비라는 단어의 뜻이나 알기나 할까? 황실 연회에 진귀한 식재료를 수십 마차씩 들이붓는 동안, 저 아래 도시 빈민가에서는 아이들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단 말이야! 이번 공물 징수령은 너무 심해. 곡식뿐만 아니라, 모든 생산품의 절반을 가져가겠다고? 그럼 우린 뭘 먹고 살라는 건데!”
카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너의 그 위대한 혁명가 정신은 이번엔 어떤 기발한 해결책을 내놓았지?” 그의 목소리에는 살짝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시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비웃지 마! 난 진지해. 우리 ‘불꽃 민중단’은 더 이상 이렇게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이번엔 정말 뭔가 보여줄 차례야. 예를 들면, 제국 곡물 창고를… 불태운다거나?”
그녀의 말에 카이는 들고 있던 나무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가 지하 공간에 울렸다.
“불태워? 시아, 넌 너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어. 그 거대한 창고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야. 사방에 감시탑과 마법 방어막, 그리고 제국 정예병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다고. 게다가, 정말 그걸 불태우면 누가 이득을 보지? 우리가 굶는 건 매한가지인데.”
“그럼 어쩌자는 거야? 매일 쥐죽은 듯 숨어 지내면서 제국이 내려주는 찌꺼기나 받아먹자는 거야?” 시아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획 돌렸다.
그때, 지하로 연결된 삐걱이는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작고 재빠른 발소리였다. 이내 시아의 어린 동생 렌이 허둥지둥 뛰어 내려왔다. 그의 작은 얼굴은 땀범벅이었고, 눈은 잔뜩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누나! 카이 형! 큰일 났어!”
시아는 렌에게 달려가 어깨를 잡았다. “무슨 일이야, 렌? 또 제국 순찰대라도 본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잿빛 협곡’에서 온 행상인이 말인데, 제국 황실에서 새로운 포고령을 내렸대!” 렌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용해서 황성 보수 작업에 투입한대! 근데 그게 그냥 보수 작업이 아니라, ‘영혼 마법진’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 쓰이는 인신 공양 작업이라는 소문이…!”
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카이의 표정 역시 순간 굳어졌다. ‘영혼 마법진’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악명 높은 이야기였다. 고대 제국이 적들을 학살하고 그 영혼을 흡수하여 마법의 힘을 얻었다는 잔혹한 기록.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제국의 타락이 너무 깊었다.
“젠장.” 시아는 나직이 욕설을 뱉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이건 선을 넘은 거야.”
카이는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그림자가 촛불 불빛에 길게 늘어졌다.
“렌,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해봐. 어떤 젊은이들을 징용한다고 했지? 혹시 아는 사람 중에 끌려간 사람이 있나?”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차분하고 냉정했다.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웃 마을에서 ‘별똥별 마법사’로 불리던 엘라 누나도 끌려갔다고 해요! 제국 병사들이 대낮에 들이닥쳐서…”
시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엘라는 마을 아이들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던 친절한 누나였다. 그녀의 재능을 탐낸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할 일은 정해졌어, 카이.” 시아는 카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엔 그 창고를 불태우는 게 아니야. 우린 그들에게서 엘라를 되찾아올 거야. 그리고 그 잔혹한 ‘영혼 마법진’ 계획을 만천하에 드러낼 거라고!”
카이는 시아를 잠시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전례 없는 결의가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꽃 너머에는 두려움 또한 읽혔다. 그는 피식 웃었다.
“엘라를 되찾아오고… ‘영혼 마법진’ 계획을 만천하에 드러낸다고? 정말이지, 네 허무맹랑한 계획은 언제쯤 현실 감각을 찾을까 모르겠네. 그건 그냥 창고를 불태우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위험한 일이야. 황성 지하에 갇힌 사람을 구출하는 건 제국 심장부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시아는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당신이야말로 맨날 입으로만 투덜거리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제에!”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고?” 카이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내가 없었으면 네놈들의 ‘불꽃 민중단’은 벌써 제국 병사들 아침밥이 됐을 걸. 지난번 도시 외곽 밀수품 사건 때도 누가 귀찮은 뒷수습을 다 했지?”
“그건 당신이 원래 그런 일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 난 그저 전략을 짰을 뿐이고!”
“그 ‘전략’ 덕분에 우리가 들킬 뻔한 적이 몇 번이었는지 기억은 나고?”
둘의 티격태격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렌은 한숨을 쉬며 그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언제나 이랬다. 누나는 열정만 가득하고, 카이 형은 너무 신중한 척하면서도 결국은 누나를 돕는 쪽으로 기울었다.
한참을 언성을 높이던 시아가 멈칫했다. 그녀는 숨을 고르더니 카이에게 한 발 다가섰다.
“어쨌든, 이번엔 진심이야. 나는 엘라를 구하러 갈 거야. 당신이 도와주지 않아도, 나 혼자라도 갈 거라고. 그럼 당신은 여기서 평생 도둑질이나 하면서 비겁하게 숨어 살아.”
시아의 도발에 카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지하 여관은 촛불의 흔들림만으로도 비장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카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늘 그렇듯 약간 비꼬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체념한 듯했다.
“젠장, 네놈의 그 무모한 용기가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하는군. 좋아. 대신 내 조건이 있어.”
시아는 눈을 반짝였다. “뭔데?”
“이번 작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지시에 따라야 해. 그리고… 임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당분간 내 말을 거역하지 마.”
시아는 순간 망설였다. 카이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견을 상당 부분 접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엘라를 구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좋아. 대신, 임무가 끝나면 나도 당신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할 거야. 어떤 것이든 무조건 들어줘야 해!”
“흥, 네 놈이 내게 뭘 요구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군.” 카이는 짐짓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은 이미 작전 구상에 몰두하는 듯 보였다.
“렌, 황성 경비병들의 교대 시간과 순찰 경로, 그리고 ‘잿빛 협곡’에서 온 행상인이 언급했던 ‘영혼 마법진’ 관련 소문을 최대한 자세히 알아봐 줘.” 카이는 렌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시아, 넌 우리 ‘불꽃 민중단’ 멤버들에게 은밀히 연락을 돌려. 이번엔 좀 더… 은밀하고, 조용하게 움직여야 할 거야.”
시아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돌았다. 그녀는 카이를 보며 활짝 웃었다.
“역시 카이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니까! 네가 있으니 든든해!”
카이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이번에 우리 둘 다 감옥에 끌려가면, 네 놈이 나한테 평생 밥이나 먹여야 할 줄 알아.”
“흥, 걱정 마! 내가 황실 주방장을 때려잡아서 네가 평생 먹을 음식 정도는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시아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들의 대화는 여전히 티격태격했지만, 그 속에는 이제 제국에 맞설 결의와 더불어, 어딘가 모르게 설렘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여관은, 그들의 작지만 뜨거운 불꽃으로 인해 조금씩 밝아지는 듯했다. 내일이면, 이 도시의 밤은 또 한 번 시끄러워질 터였다. 제국의 귀족들이 태평하게 잠든 사이에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