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어두컴컴한 심해의 그림자처럼, 길드의 아지트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짙은 푸른색 수정들이 벽면을 따라 몽환적인 빛을 뿜어냈고, 바닥에 깔린 카펫은 발소리조차 삼켜버릴 듯 포근했다. 강민준은 길드 마스터의 전용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허공에 떠오른 길드 현황판을 응시했다.

‘불패기사단’. <에테르나> 서버 내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길드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불패기사단을 이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민준은 지난 5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전략, 전술, 아이템 파밍 동선, 인재 관리… 그 모든 복잡한 퍼즐 조각을 맞춰 거대한 그림을 완성한 것은 다름 아닌 민준, 자신이었다.

“민준아.”

나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길드 부마스터이자 민준의 가장 친한 친구인 최도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도윤은 늘 그랬듯 깔끔한 용사 세트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빛나는 외모는 길드의 간판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길드원들 사이에서는 도윤이 불패기사단의 얼굴 마담이자 실세로 알려져 있었다. 민준은 언제나 그림자 속에서 모든 것을 조율했다. 그는 그 사실에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도윤은 겉으로 드러나는 명예를, 민준은 실질적인 권력과 만족감을 나누어 가졌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도윤아, 왔냐? 신규 던전 공략 준비는 어떻게 돼가?” 민준이 편안하게 물었다.

도윤은 민준의 바로 앞까지 와서 섰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따뜻한 신뢰를 담고 있던 민준의 눈빛. 도윤은 그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러나 입가에는 낯선 미소를 띠었다.

“응, 잘 돼가고 있지. 그런데 그전에, 할 얘기가 좀 있어.”

민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딱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데? 중요한 얘기야?”

“응, 아주 중요한 얘기지.” 도윤은 짧게 대답하더니, 민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민준의 심장을 꿰뚫는 얼음 칼날과도 같았다. “강민준, 너는 오늘부로 불패기사단에서 제명이야.”

민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가 순간적으로 말을 잃자, 도윤은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어두운 복도에서 몇몇 길드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드 내에서 도윤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핵심 멤버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정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비웃음과 냉소가 서려 있었다.

“도윤아, 무슨 소리야? 장난치지 마.” 민준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장난? 이걸 장난으로 들었어? 네가 설마 나한테? 민준아, 정신 차려. 난 지금 아주 진지해.” 도윤은 민준의 표정을 즐기는 듯했다. “그래, 네가 충격을 받는 것도 당연하겠지. 지난 5년 동안 네가 이 길드를 위해 얼마나 개처럼 일했는지 잘 아니까.”

“개처럼…?” 민준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최도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알아? 이 길드를 여기까지 끌어올린 건 나야! 네가 뭘 했다고 감히…!”

“내가 뭘 했냐고?” 도윤이 비웃으며 한 발자국 다가섰다. “네놈은 늘 그림자 속에 처박혀서 숫자나 끄적거리고 있었지. 길드의 얼굴, 대외적인 명성, 그리고 사람들을 모으는 매력… 이 모든 건 내가 만들어낸 거야! 네놈은 그냥 내 뒤치다꺼리나 하는 주제에 뭘 잘났다고 떠들어?”

민준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길드의 시스템, 재정, 전략, 인력 관리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했던 것은 민준이었다. 도윤은 그저 민준이 짜놓은 판 위에서 멋지게 춤을 추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네놈이 길드 금고에 손을 댔다는 제보가 들어왔어.” 도윤이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내가 금고에 손을 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길드 금고 시스템은 내 지문과 네 지문이 동시에 있어야 열리게 돼 있어. 네가 모를 리 없잖아!”

“오래전부터 길드 자금을 횡령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명확하게 포착됐어. 길드 내부 감사 결과 그렇게 나왔으니 나도 어쩔 수 없지.” 도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증거? 그거 네가 조작한 거잖아!” 민준이 소리쳤다. “네가 감사를 주도했잖아!”

“길드원들의 신뢰를 져버린 죄는 용서받을 수 없어. 더군다나 너는 길드 내 최고 권한자 중 하나였지. 실망이 크다, 민준아.” 도윤은 차갑게 민준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과거의 우정이나 신뢰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오만함과 냉기만이 가득했다.

시스템 메시지가 민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 길드 <불패기사단>에서 추방당했습니다. ]
[ 길드에 기여한 모든 기여도가 초기화됩니다. ]
[ 길드 공용 창고에 보관된 모든 아이템 및 자금은 길드에 귀속됩니다. ]
[ <불패기사단> 길드원들에게 ‘배신자 강민준’으로 표식됩니다. ]
[ 명예도가 대폭 하락했습니다. ]
[ ‘카오틱’ 상태가 됩니다. ]

민준의 레벨은 780. 서버 랭킹 10위 안에 드는 고랭커였다. 착용 중인 아이템 역시 모두 최고 등급의 에픽 혹은 레전드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길드 공용 창고에는 그가 직접 파밍하고 모은 엄청난 양의 재료, 골드, 심지어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신화 등급의 무기 설계도까지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이제 모두 도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나와. 더 이상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도윤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민준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불타올랐다. 배신감, 분노, 그리고 지독한 절망감이 그의 온몸을 갉아먹었다. 그는 도윤의 멱살을 잡고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주변에 서 있는 길드원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미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그에 대한 경멸만이 있었다.

“최도윤….”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우리가 같이 쌓아온 시간이 얼만데…!”

“시간? 겨우 그깟 시간이 대단한 줄 알아? 난 이 순간을 위해 네놈 옆에서 5년을 참고 기다렸어.” 도윤은 민준의 손을 뿌리치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 길드는 온전히 내 것이야. 그리고 네놈은… 그냥 사라져주면 돼.”

“사라지라고? 웃기지 마. 난 절대 안 사라져.” 민준의 눈빛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섬뜩하게 변했다. “네가 나한테서 뭘 빼앗았는지, 네가 나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도윤은 비웃었다. “웃기고 있네. 카오틱 상태의 랭커도 아닌 놈이 뭘 할 수 있다고? 당장 필드에 나가면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널 사냥하려고 달려들 거야. 넌 이제 그냥 먹잇감일 뿐이야. 최강의 길드에서 쫓겨난 비참한 쓰레기.”

민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들을 노려보며 천천히 아지트 문을 나섰다.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민준의 뒷모습은 너무나 초라했지만, 그의 등 뒤에서는 지옥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맹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거대한 도시 ‘엘드레인’의 번화가. 언제나 활기 넘치던 이곳이 민준의 눈에는 잿빛으로 변해 보였다. 그의 캐릭터 머리 위에는 붉은색의 ‘카오틱’ 표식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렸다.

“저거 봐, 배신자 강민준이래.”
“어휴, 불패기사단에서 쫓겨난 놈이잖아? 불패 공금 횡령했다던데.”
“저런 쓰레기 새끼는 당장 사냥해서 현상금이나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멸시와 조롱, 그리고 사냥을 위한 노골적인 탐욕이 담긴 시선들이 쏟아졌다.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에테르나> 속에서 최강의 길드를 건설하며 수많은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이 가상현실 속에서 그는 삶의 유일한 빛이자 목표를 찾았었는데, 그 빛마저 가장 믿었던 친구의 손에 의해 꺼져 버렸다.

민준은 도시 외곽의 낡은 여관으로 향했다. 가장 저렴한 방을 잡고 접속을 끊었다. 현실로 돌아와 캡슐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에테르나>의 잔혹한 배신으로 가득했다.

‘최도윤….’

민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주먹이 벽을 내리쳤다.
네가 나한테서 빼앗아간 모든 것. 명예, 재산, 그리고 내 5년의 시간…
나는 반드시 너에게 돌려줄 것이다.
네가 서 있는 그 최고 높은 자리에서, 가장 비참하게 끌어내릴 것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빛났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지옥보다 더 잔혹한 복수극의 서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