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폭우였다. 사방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비는 도시의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고, 희뿌연 안개처럼 건물들을 감쌌다. 그의 차는 빌딩 숲 가장자리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었다. 차가운 금속성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핸들을 쥔 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진우. 한때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촉망받는 기업인이자, 동시에 가장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남자. 이제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그림자 같은 존재.
“곧 시작하겠군.”
그의 시선은 정면의 초고층 빌딩, ‘세현 타워’의 가장 높은 층에 박혀 있었다. 준혁의 사무실이었다. 정확히는, 준혁이 빼앗아 간 그의 사무실이었다. 그 빌딩의 맨 위층은 언제나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마치 준혁의 속내처럼.
이진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불길이 일렁였다. 3년 전, 그 불길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잿더미만 남겼다. 그리고 이제, 그 잿더미 속에서 차갑게 응축된 복수의 칼날이 솟아올랐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낮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한 글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완료.]
짧은 한 단어였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거대한 파괴의 서막이었다. 이진우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끝으로 창문의 습기를 쓸어내자, 세현 타워의 실루엣이 더욱 선명해졌다. 저 거대한 탑이, 곧 무너지기 시작할 터였다.
* * *
세현 타워 70층, 최첨단 회의실.
강준혁은 흐트러짐 없는 미소로 기자회견장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수십 대의 카메라와 수백 명의 기자들이 그를 향해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의 야심작, 수년간 공들여온 ‘오리온 프로젝트’의 최종 발표 현장이었다. 강준혁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완벽하게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옆에는 충성스러운 비서가 최종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강준혁 대표님, 오리온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 기자의 질문에 준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성공 가능성이라뇨. 저는 확신합니다. 오리온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닙니다. 인류의 미래를 바꿀 거대한 도약이 될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3년 전, 이진우의 아이디어를 가로채고, 그를 횡령범으로 몰아 나락으로 떨어뜨린 후, 자신은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오리온 프로젝트는 그 제국의 정점이었다. 비록 이진우가 그 아이디어의 ‘진정한’ 아버지였지만, 누가 알겠는가. 역사는 승자의 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럼, 이제 프로젝트의 핵심 내용을 공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비서가 손짓하자, 회의실 전면의 거대한 스크린에 ‘ORION PROJECT’라는 문구가 웅장하게 떠올랐다. 준혁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과 배신을 쌓아왔던가.
첫 번째 슬라이드가 넘어갔다. 인공지능이 구현하는 아름다운 미래 도시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기자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준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오리온 프로젝트는…”
그가 설명을 시작하려는 순간, 갑자기 스크린이 파르르 떨리더니 검은색으로 변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준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김 비서,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그는 목소리를 낮춰 비서에게 물었다.
김 비서는 당황한 얼굴로 무선 이어폰을 눌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잠깐의 오류인 것 같습니다. 곧 복구될 겁니다.”
하지만 스크린은 복구되지 않았다. 오히려 섬광이 번쩍이더니, 화면이 순식간에 난잡한 코드들의 향연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코드들 사이로 붉은 글씨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피가 번지는 것처럼, 섬뜩하게.
[3년 전, 그날을 기억하나?]
회의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준혁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3년 전? 그날? 무슨 의미지?
[네가 짓밟았던 진실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스크린의 글씨가 바뀌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다음 글씨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세현 타워 70층, 강준혁 대표의 오리온 프로젝트는 이진우의 아이디어를 불법적으로 도용한 사기극입니다. 횡령의 누명을 쓴 이진우는 무죄이며, 진범은 강준혁입니다.]
회의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이진우 씨라면, 3년 전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자살했던 그 이진우 씨 말입니까?”
“강준혁 대표님,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이 메시지가 사실입니까? 답변해주십시오!”
준혁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심장은 마치 쇠망치로 얻어맞는 듯 격렬하게 뛰었다. 이진우? 죽은 이진우가 어떻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조작입니다! 해킹입니다! 당장 화면을 꺼! 당장!”
비서와 직원들이 허둥지둥 스크린을 조작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화면은 계속해서 붉은 글씨를 뿌려댔다. 이제는 구체적인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년 전, 이진우의 회사에서 빼돌려진 비밀 자료들과, 준혁이 이를 이용해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를 출원하는 과정이 담긴 내부 고발성 문서들이 스크린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이진우를 파멸시킨 횡령 사건의 진실을 담은 녹취 파일 일부가 짧게 재생되기까지 했다. 준혁의 목소리였다. “그 자식, 완전히 끝났어. 이제 이 모든 게 내 거다.”
회의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많은 기자들의 눈빛은 의심과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질문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준혁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3년 전의 악몽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했다. 아니, 악몽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남은 것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였다.
[네가 쌓아 올린 거짓의 탑은, 이제 그 첫 균열을 맞이했다. 다음은 더 깊어질 것이다.]
그 순간, 회의실의 전원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암흑 속에서 수많은 카메라의 플래시가 일제히 터져 올랐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준혁의 일그러진 얼굴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는 마치 함정에 빠진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 *
이진우는 차 안에서 그 모든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첫 균열이라… 제법 잘 어울리는군.”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USB를 꺼내 들었다. 방금 터진 대형 해킹 사건의 주범, 아니, 주모자가 바로 그 USB 하나로 모든 것을 시작했다. 3년의 시간 동안, 그는 지옥에서 살아남아 어둠 속에서 칼날을 갈았다. 치밀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그는 창밖의 세현 타워를 다시 바라보았다. 70층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직 멀었어, 준혁아. 이건 시작일 뿐이야. 네가 나에게 주었던 고통의 천 배, 만 배를 되갚아줄 테니.”
이진우의 눈빛은 깊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USB 표면을 쓸어내렸다. 이제 막 시작된 복수의 서막이었다. 그 복수의 끝은, 준혁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 그 이상일 터였다. 그는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빗소리에 묻혀, 그의 차는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다음 타겟을 향해. 다음 파멸을 설계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