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이 무겁게 들렸다. 희뿌연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자 가장 먼저 코끝을 찌르는 낯선 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갓 구운 빵 냄새와 풀잎의 싱그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향신료의 이국적인 내음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분명 나는 어제 밤늦게까지 밀린 서류들을 처리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졸다 깨어난 게 아니라, 왜 이런 생경한 향 속에서 눈을 뜨게 되었을까.
몸을 일으키려 하자 뼛속까지 시린 통증이 전신을 엄습했다. 젠장, 이러다 정말 과로사라도 하는 건 아닐까. 어째 몸이 영 좋지 않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내 원룸 천장이 아니라, 나무와 석재로 어우러진 웅장한 아치형 천장이었다. 햇살이 창백하게 비껴 들어오는 창밖으로는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회색빛 지붕들이 촘촘히 이어지고, 저 멀리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이게… 꿈인가?”
속삭이듯 내뱉은 말은 한국어가 아니었다. 유창하지만 낯선,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가 내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혼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동시에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알 수 없는 지식과 기억들이 뇌리에 강제로 주입되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레오 카스티엘.’ 그게 지금의 내 이름이었다.
이곳은 알비온 대륙, 아르카디아 왕국의 수도, 발도르프. 나는 카스티엘 가문의 서자이자, 병약해서 늘 저택 안에서만 지내던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다. 병약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특히 논리와 추론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는 평판을 가진 아이. 그리고 나는, 32년 인생을 대한민국 서울에서 형사 강윤재로 살았던 기억을 가진 채, 이 몸에 빙의한 이세계 전생자였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묘하게도 내 지난 삶의 기억과 레오 카스티엘의 기억은 마치 강물이 합쳐지듯 자연스럽게 융합되었다. 덕분에 혼란은 예상보다 짧았다. 나는 내가 더 이상 강윤재가 아님을, 그리고 이곳이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님을 빠르게 인지했다. 동시에,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추리 본능은 이 새로운 세계의 모든 것을 분석하고 이해하려 들었다.
며칠간 침대에서 쉬며 몸의 회복을 기다렸다. 그리고 레오 카스티엘의 몸은 놀랍도록 빠르게 활력을 되찾았다.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강윤재의 날카로운 지성이 합쳐지자, 나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에 적응해갔다. 이곳의 문화, 역사, 심지어 정치까지, 흡사 추리소설의 배경 설정을 파고들 듯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발도르프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중 한 명인 알베르트 경의 생일 연회 초청이었다. 카스티엘 가문은 명문 귀족이었으나 최근 기세가 기울고 있었고, 알베르트 경은 신흥 상인 계급의 거두였다. 겉으로만 봐도 상충되는 두 가문의 교류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레오는 늘 저택에 틀어박혀 지냈기에 외부 연회는 처음이었다. 어쩌면 상인 계급과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가문의 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꺼이 연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 첫 번째 사건이 언제 터질지 은근히 기대하며.
***
에르미아 저택은 발도르프 북서쪽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고요한 숲에 둘러싸인 그곳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횃불과 마법의 빛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된 넓은 정원에는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화려한 드레스와 각 잡힌 연미복 차림의 귀족들 사이로, 나는 갓 스무 살이 된 레오의 몸으로 서 있었다. 내 안에 잠든 강윤재는, 고작 스무 해 남짓 살았던 레오의 삶과, 이 삼십 대 중반의 남자의 지성을 뒤섞어놓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연회는 화려하고 시끄러웠다. 오케스트라의 감미로운 선율이 울려 퍼지고, 하인들은 끊임없이 고급스러운 음식과 술을 날랐다. 나는 인파 속에서 조용히 벽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특히 알베르트 경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는 최근 몇 년간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짓밟고 올라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쩌면 그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이 연회에 참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젊은 도련님,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친절하지만 어딘가 뻣뻣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백발의 노인 집사가 서 있었다. 알베르트 경의 집사인 ‘필립’이었다. 그는 저택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듯 보였고, 그의 눈은 매 순간 주변을 스캔하며 사소한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듯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저 연회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필립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를 불러주십시오. 알베르트 경께서 특별히 도련님께 신경 쓰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알베르트 경이 왜 나에게 특별히 신경 쓰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연회는 점차 무르익었다. 알베르트 경은 연회의 중심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살이 찐 몸집에 탐욕스러워 보이는 눈빛, 하지만 능숙한 처세술로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는 듯 보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알베르트 경의 우렁찬 목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오늘 이렇게 귀한 걸음 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잠시 중요한 손님과의 대화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연회를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몇몇 귀빈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집사 필립과 함께 연회장 한쪽에 자리한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서재는 평소 알베르트 경만이 드나들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밀스러운 대화라도 나누려는 모양이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연회장의 떠들썩함 속에서도 문득 어떤 위화감이 느껴졌다. 알베르트 경이 서재로 들어간 뒤로, 필립 집사도, 알베르트 경도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중요한 대화가 길어지나 보다 했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인 것은 이상했다.
그때였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연회장을 갈랐다. 모든 시선이 비명 소리가 들린 서재 쪽으로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한 귀족 부인이 얼굴을 새파랗게 질린 채 외쳤다. “무슨 일이죠? 저, 저 소리는…!”
웅성거림이 삽시간에 연회장을 뒤덮었다. 몇몇 용감한 신사들이 서재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이 잠겨 있습니다!”
“알베르트 경! 필립 집사!”
문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결국, 힘센 기사 몇 명이 달려와 굳게 닫힌 서재 문을 부쉈다. 육중한 나무 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 쓰러져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서재 안에서 풍겨 나오는 비릿한 쇠 냄새가 연회장 공기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재 안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알베르트 경은 거대한 책상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등에는 빛나는 은색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고, 선홍빛 피가 책상을 적시고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죽음의 공포로 일그러진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집사 필립은 알베르트 경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떨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흉기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경악과 충격으로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살, 살인이야! 알베르트 경이 살해당하셨어!”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과 울음소리, 그리고 혼란스러운 발소리가 뒤섞였다.
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홀린 듯 서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의 창문들은 모두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고, 높아서 성인이 드나들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다. 방에는 알베르트 경과 집사 필립, 그리고 쓰러진 알베르트 경의 시신뿐.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밀실 살인.
강윤재였던 내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비린내와 절규 속에서도, 내 이성만큼은 차갑게 빛났다.
‘왔구나. 드디어 올 것이 왔어.’
새로운 세계에서의 첫 번째 사건. 그리고 그것은, 나 강윤재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난해한 살인극이었다. 사람들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나는 기묘한 흥분과 함께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흥미롭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내 말은, 오직 내 귀에만 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