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강태한은 한참을 그를 응시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도시의 불빛이 제멋대로 이선우의 얼굴 위에서 부서졌다. 그 찬란한 빛조차도 기만적인 가면처럼 느껴졌다. 태한의 시선은 펜대 쥔 손가락 끝에서부터 비스듬히 드리워진 어깨선, 그리고 만족감으로 희미하게 물든 입꼬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움직임을 집요하게 좇았다.
“네가 누리던 그 모든 것. 찬란하게 빛나는 저 가짜 왕관… 이제부터 서서히, 아주 천천히 녹아내릴 거야.”
태한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새벽 안개처럼 희미하고 차가웠다. 손에 든 스마트폰 화면에는 이선우의 비서가 방금 보낸 메일이 떠 있었다. 수신인은 태한, 발신인은 비서. 그러나 그 메일은 완벽하게 위조된 것이었다. 단 한 줄의 문장, 그리고 첨부된 한 장의 사진.
**[파일 첨부: Seonwoo_Project_Alpha_Final.pdf]**
이메일 제목은 평범했다. 하지만 첨부된 PDF 파일을 연 순간, 태한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파일 속 어딘가에, 미세한 균열이 심어져 있었다. 겉으로는 완벽한 사업 계획처럼 보이지만,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전체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는 치명적인 오류. 마치 썩어가는 사과 속 벌레 구멍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갉아먹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선우가 전화를 받았다.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 태한은 그의 표정을 읽었다. 아마 성공적인 거래, 혹은 축하 메시지였으리라. 그는 잔을 들고 창밖 야경을 향해 건배하는 시늉까지 했다.
“그래, 선우야. 실컷 마셔둬. 네가 가진 그 잔이, 언젠가 독으로 가득 찰 테니까.”
태한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씨앗은 뿌려졌고, 이제 싹이 트고 자라기를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
이선우는 묘한 불쾌감에 이마를 짚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텅 빈 사무실, 그 한가운데 혼자 앉아 있는데도 등골이 서늘했다. 오늘따라 유독 기시감이 심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젠장, 피곤해서 그런가.”
그는 투박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최근 몇 달간 몰아친 프로젝트들 때문에 몸이 녹초였다. 어쩌면 스트레스가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불쾌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돌멩이 하나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고 둥글납작한, 평범한 조약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돌멩이에는 작은 흠집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칼날로 억지로 새겨 넣은 듯한, 흐릿한 초승달 모양의 흠집.
선우는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더욱 신경을 긁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이 돌멩이가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오늘 아침에는 분명히 없었다.
문득 잊고 지내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강태한.
‘설마….’
선우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미쳤지, 강태한이라니. 그는 이미 5년 전에… 아니, 잊기로 했다. 그날의 일은 철저히 묻어버렸다. 어차피 그 친구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선우는 그렇게 자신을 다그쳤다.
그때, 컴퓨터 화면이 갑자기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맑고 청량한 소리와 함께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발신인은 알 수 없음. 제목 없음. 본문은 비어 있었다. 오직 첨부 파일 하나만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선우는 망설였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손에 든 돌멩이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파일을 클릭했다.
파일이 열리고, 화면 가득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떴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두 남자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한 명은 자신,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강태한. 낡은 등산복을 입고, 땀으로 얼룩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행복해 보였다. 사진의 배경은 그들이 종종 찾아갔던 인적이 드문 산 정상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함께 미래를 꿈꿨다. 성공하면 어떤 삶을 살지, 결혼은 언제 할지, 자식은 몇 명을 낳을지… 어리석고 순진했던 약속들.
사진 아래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직접 연필로 쓴 듯한, 흐릿한 손글씨체로.
**”기억나니, 선우야. 우리가 함께 꿈꾸던… 그날 밤.”**
선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날 밤. 그들은 산 정상에서 야영을 하며, 밤하늘의 별을 보며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태한은 잠시 자리를 비웠고, 선우는 우연히 태한의 가방에서 그의 사업 아이템이 담긴 기획서를 발견했다. 그때 그는 그 기획서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손에 든 조약돌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초승달 모양의 흠집. 그 흠집은 바로 그날, 태한이 돌멩이에 칼로 새겨 넣었던 자신들의 우정의 징표였다. 자신도 똑같은 모양으로 돌멩이를 깎아 태한에게 건넸었다.
“강… 태한…?”
선우의 목소리가 사무실 공허 속으로 힘없이 흩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차가운 손으로 자신의 목을 쥐는 것 같았다. 그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텅 빈 사무실. 하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을 꿰뚫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순간, 멀리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차갑고, 잔인하며, 한없이 만족스러운 웃음소리.
그는 테이블 위로 허리를 숙였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복수. 그 단어가 선우의 뇌리를 강하게 스쳤다.
그가 돌아왔다. 자신을 묻었던 그 자리에서, 그는 기어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