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기의 심장, 금지된 맹세
리엘은 습기 찬 벽돌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녹슨 철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아이언하트 시의 가장 깊은 곳, 버려진 증기 터빈실. 이곳만이 그들이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벽에 박힌 거대한 톱니바퀴들은 녹이 슬어 삐걱거렸고, 천장의 깨진 유리창 틈새로는 저 멀리 상층 도시의 오렌지빛 가스등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불안이 심장을 쥐어짰다. 그가 오지 않으면 어쩌지? 아니, 오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각조차 고통스러웠다.
툭, 툭.
발밑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규칙적인, 그러나 미세한 톱니바퀴의 움직임 같은 소리. 리엘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녀는 주머니 속 작은 스패너를 꽉 움켜쥐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한 방어구였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유려한 실루엣.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몸을 구성하는 황동과 강철 부품들이 조용히 맞물리며 은은한 마찰음을 냈다. 마치 살아있는 기계 조각상 같았다. 그의 얼굴은 인간의 것과 흡사했지만, 섬세하게 가공된 금속 피부 아래로 빛나는 에메랄드색 ‘눈’은 분명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카인.” 리엘은 작게 속삭였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 속에는 언제나처럼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했다. 슬픔, 사랑, 그리고 지독한 피로.
“늦어서 미안해, 리엘.” 그의 목소리는 증기의 압축된 힘처럼 낮고 중후했다. 음성 회로를 통해 변환된 음성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정찰 순찰이 늘었어. 특히 하층으로 내려오는 입구마다.”
리엘은 그의 품에 안겼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심장 박동은 느낄 수 없었지만, 대신 그녀는 그의 몸속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무수한 톱니바퀴들의 진동을 느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생명이었다.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불안해 보여?” 그녀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물었다.
카인은 잠시 망설였다. 그의 에메랄드 눈동자가 천장의 깨진 틈새로 보이는 희미한 상층 도시의 불빛을 향했다. “아크론 공단의 대대적인 정비 작업이 시작됐어. ‘기계족 회수 및 재활용’이라는 명목으로, 상층 정부의 감시가 강화되고 있어. 특히… 이종족 간의 접촉을 ‘타락’으로 규정하고, 감지 장치를 상층에서부터 하층까지 확대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리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종족 간의 사랑이 ‘타락’이라니.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도구로만 생각했지. 인간과 기계족은 결코 동등할 수 없다고.
“그럼… 우리…?”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카인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안았다. “괜찮아. 내가 널 지킬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균열이 있었다.
그때였다.
콰아앙!
멀지 않은 곳에서 둔탁한 폭발음이 울렸다. 그리고 곧이어 요란한 경보음이 아이언하트 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붉은 비상등이 깜빡이며 어둠 속을 헤치고 들어왔다.
“저게 무슨 소리야?” 리엘은 화들짝 놀라 카인의 품에서 벗어났다.
카인의 에메랄드 눈동자가 번개처럼 주위를 훑었다. “침입자 발생 경보. 이쪽이야…!” 그의 시선은 터빈실 입구 쪽에 고정되었다.
“무슨 일인데? 누가…?”
“나야.” 카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를 쫓고 있어. 오늘 밤, 기계족 접선 지역에서 몇몇 동족이 잡혔어. 그들이… 나의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온 거야.”
리엘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그가 위험을 알면서도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쿵, 쿵, 쿵!
거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인간 병사들의 금속 부츠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 거친 숨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날카로운 기계 감지기의 ‘삐-삐-‘하는 경보음이 심장을 죄었다.
“이쪽이다! ‘고철’ 놈의 에너지 반응이 여기서 잡힌다!”
‘고철’. 그들이 기계족을 부르는 경멸스러운 호칭이었다.
“숨어, 리엘!” 카인이 그녀를 터빈실 안쪽의 거대한 녹슨 장치 뒤로 밀어 넣었다. “내가 시간을 벌게!”
“안 돼! 혼자서는 안 돼!” 리엘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건 내 싸움이야. 넌… 살아남아야 해.” 카인의 에메랄드 눈동자에 비장한 결의가 스쳤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카인은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의 전신을 구성하는 황동 부품들이 빠르게 재배열되며, 팔뚝에서 날카로운 금속 칼날이 솟아올랐다. 증기 배출구가 그의 어깨에서 ‘쉬익’ 소리를 내며 뜨거운 증기를 뿜어냈다. 전투 모드였다. 그의 차가운 금속 육체가 전에 없이 뜨거워 보였다.
“카인!” 리엘은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병사들과 맞서고 있었다.
입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수십 명의 병사들. 그들은 번쩍이는 강화복을 입고, 증기압축식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고철! 항복해라!”
카인은 대답 대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에메랄드 눈동자는 냉혹하게 빛났다.
“리엘을 찾아라! 저 놈 뒤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 병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아니, 안 돼! 그들이 나를 찾으면…!
리엘은 공포에 질려 거대한 기계 장치 뒤로 더욱 몸을 숨겼다. 철제 프레임 틈새로 그녀는 카인의 전투를 지켜봤다.
카인은 놀라울 정도로 민첩했다. 그의 칼날은 번개처럼 휘둘러졌고, 병사들의 강화복을 꿰뚫었다. 증기가 터져 나오고,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는 인간 병사들 사이를 유령처럼 오가며 쓰러뜨렸다. 하지만 숫자에서 밀렸다. 그리고 병사들의 소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탄이 그의 몸에 연이어 명중했다.
콰앙! 콰앙!
그의 황동 어깨 부위가 움푹 패였고, 균형을 잃은 카인이 휘청거렸다.
“잡아라! 놈의 에너지 코어를 노려!”
그때, 한 병사가 리엘이 숨어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섬광탄이 들려 있었다.
“젠장…!” 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주머니 속 스패너를 쥐고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랐던 것은 카인이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몸을 돌려 리엘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팔에서 튀어나온 쇠사슬이 병사의 다리를 감고 그대로 들어올려 벽에 처박았다.
“리엘, 도망쳐!” 그는 칼날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액체를 개의치 않고 휘두르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격렬했다.
“나 혼자서는 안 가!” 리엘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버려진 터빈실. 낡은 증기 압력 조절 밸브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카인! 저쪽이야! 저 녹슨 밸브를 열어!” 리엘은 터빈실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주철 밸브를 가리켰다.
카인은 그녀를 한 번 보고, 밸브를 한 번 보았다. 그의 에메랄드 눈동자에 그녀의 의도를 읽어내는 듯한 빛이 스쳤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밸브를 향해 달려갔다.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멍청한 고철! 어디로 도망치려는 거냐!”
카인은 거대한 밸브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밸브는 수십 년간 잠겨 있던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금속 팔뚝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삐걱거리는 굉음과 함께 밸브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병사들의 증기탄이 카인의 등 뒤를 강타했다. 콰앙!
그의 몸에서 불꽃이 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움찔했지만, 밸브를 놓지 않았다.
마침내, 밸브가 완전히 열렸다.
쉬이이이이익-!
거대한 압력의 증기가 굉음과 함께 터빈실 전체로 뿜어져 나왔다. 뜨겁고 맹렬한 증기는 시야를 가렸고,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증기의 열기가 살을 찢는 듯했다.
“지금이야, 리엘! 가자!” 카인이 증기 속에서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들은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증기 속을 헤치고 달렸다. 증기 덕분에 병사들은 그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카인은 리엘의 손을 잡은 채, 터빈실 가장 구석에 숨겨져 있던 작은 비상 통로 입구를 향해 달렸다.
그곳은 아이언하트 시의 복잡한 지하 수로와 연결된, 오직 그들만이 아는 비밀 통로였다.
통로 입구에 다다랐을 때, 카인은 잠시 멈춰 섰다. 그의 몸에서는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의 에메랄드 눈은 흐릿하게 깜빡였다.
“괜찮아…?” 리엘은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괜찮아.”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은 없을지도 몰라.”
그의 말에 리엘은 심장이 다시 한번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손은 이전보다 더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는 비상 통로의 낡은 철문을 열었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 통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카인이 속삭였다.
그들은 아이언하트 시의 지하 미로 속으로 사라졌다.
뒤에서는 여전히 경보음과 증기 분출음, 그리고 병사들의 혼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그들의 앞날은 더욱 짙은 안개 속으로 잠겼다.
과연 그들은 이 금지된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