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붉게 물든 맹세
이진은 모든 감각이 불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눈을 떴다. 시야는 피와 흙먼지로 흐릿했고, 귓가에는 살을 에는 듯한 싸늘한 바람 소리만이 맴돌았다. 축 늘어진 팔을 간신히 움직여 얼굴에 묻은 핏덩이를 닦아냈지만, 그것조차 엄청난 고통을 동반했다. 등 뒤로는 형형색색의 기운을 뿜어내던 영산(靈山)이, 이제는 그림자처럼 멀어져 있었다. 그 영산, 태청산(太淸山)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믿었던 모든 것을,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을.
그의 가슴팍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단전은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있었고, 온몸의 경맥은 뒤틀리고 꺾여 본래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간신히 숨통만 붙어 있는 이진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의 끔찍한 순간이 생생한 그림처럼 다시 떠올랐다.
***
그날, 이진과 김효찬은 태청산의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험준하고 은밀한, 천겁봉(天劫峰)의 깊은 곳을 탐사하고 있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태극영단(太極靈丹)’을 찾아서.
“진아, 조금만 더 가면 돼! 이 기운, 분명 태극영단이야!”
김효찬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열망이 가득했다. 그의 얼굴은 땀범벅이었지만,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수십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수많은 역경을 헤쳐 온 동문이자 형제였다. 서로의 등을 맡기고, 서로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 이진은 효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가로막는 기이한 암벽을 향해 영력을 끌어모았다.
“이곳에 봉인진이 쳐져 있어. 효찬, 네 현천검으로 길을 열어!”
이진의 지시에 따라 효찬은 망설임 없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현천검은 그의 몸과 마음이 하나 된 듯 유려하게 움직였고,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검기가 봉인진을 강타했다. ‘크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봉인진이 깨지기 시작했고, 암벽 뒤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영기(靈氣)가 그들을 감쌌다.
“찾았다! 정말 태극영단이야!”
동굴 안에는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연꽃이 자라고 있었고, 그 연꽃의 중심에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영롱한 알약, 태극영단이 놓여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한 알만으로도 무너진 경맥을 복구하고, 막힌 수련의 길을 뚫어줄 수 있는 궁극의 보물.
이진은 숨을 고르며 연꽃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태극영단에 닿기 직전, 섬뜩한 한기가 그의 등 뒤를 강타했다.
*콰직!*
“크억!”
등골을 꿰뚫는 듯한 엄청난 충격과 함께 이진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겨우 몸을 돌리자, 눈앞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김효찬이었다. 그의 손에는 피 묻은 현천검이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차갑게 식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효찬… 네가…?”
이진의 목소리는 경악과 배신감으로 갈라졌다. 단전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미안하다, 진아. 하지만… 너는 너무 강해. 나보다 더 강해지면 안 돼.”
효찬의 눈은 이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기로 번득였다.
“너와 함께라면 언젠가 이 세상의 정점에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더군. 정점에 설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야. 그게 너라면, 나는 영원히 너의 그림자로 살아가야 할 테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효찬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이진의 가슴팍을 정확히 노렸다.
“이 태극영단은 내 거야. 너는 여기서 썩어라.”
검날이 이진의 가슴을 찢고 들어오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알았다. 함께 나누었던 정과 의리, 수십 년간 쌓아 올린 믿음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들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효찬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력을 흡수하듯,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태극영단을 움켜쥐고 유유히 동굴을 떠났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이진을, 미련 없이 내버려 둔 채.
***
“크으으으…”
다시 현재. 이진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굴욕감에 몸을 떨었다. 주먹을 쥐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단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영맥은 끊어져 있었다. 그는 이제 그저 폐인이었다. 한때는 태청산에서 가장 촉망받는 천재 수련자였던 그가, 한순간에 이 지경이 될 줄이야.
밤하늘에는 차가운 달이 떠 있었고, 황량한 들판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면, 김효찬은 완벽하게 그의 흔적을 지울 것이다. 영원히 이 세상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 그 생각에 이진의 눈은 광기로 번뜩였다.
*죽을 수는 없어.*
*죽을 수는 없다!*
이진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단전을 더듬었다. 산산조각 난 영핵(靈核)의 잔해 속에서, 아주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너무나 미약해서 존재조차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운. 그것은 그의 본래 영핵이 아닌, 아주 어릴 적부터 그의 혈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태고의 기운이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이진 자신조차도 망각하고 있던 봉인된 힘.
그 힘은 마치 꺼져가는 불씨처럼 위태로웠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진의 심장에 뜨거운 불덩이를 던져 넣는 듯했다.
“김효찬…!”
그는 이를 악물었다. 피로 얼룩진 입가에서 희미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네놈은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설령 이 목숨이 백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너는 내 칼날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맹세는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고통에 찌든 한 마리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처절하고 외로웠다. 이진은 온몸을 뒤덮은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끊어진 영맥을 간신히 이어붙여 그 미약한 태고의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단전이 그 기운에 반응하며 아주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절망과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 속에서, 이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복수. 오직 그 한 단어만이 이진을 지탱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흙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태청산의 밤은 깊었고, 들려오는 것은 차가운 바람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그 적막 속에서, 한 존재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파괴된 몸뚱어리 안에, 지옥에서 돌아온 악귀와 같은 맹세를 품은 채.
김효찬. 네놈이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나는 피로 되갚아 줄 것이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이진의 그림자가 달빛 아래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복수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