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공상과학) 독립적인 단편 소설

황량함은 이제 아리의 두 번째 피부 같았다. 잿빛 대기가 온 세상을 덮고, 한때 높게 솟았던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찔렀다. 발아래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은 아리의 낡은 부츠에 밟혀 매번 다른 소리를 냈다. 쉬이익, 바스락, 쨍그랑. 그 소음마저 이곳에선 적막을 깨는 유일한 리듬이었다.

“모노, 잔여 에너지 얼마 남았지?” 아리의 목소리는 먼지 필터를 거쳐 나와 조금 먹먹했다.
헬멧 내장 스피커에서 차분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주 에너지 셀, 잔량 8퍼센트. 보조 셀, 20퍼센트. 현재 환경에서는 48시간 내 교체가 필요합니다. 감마-7 구역이 최적의 탐색 지점으로 분석됩니다.”
모노의 음성은 언제나 차분했다. 아리는 그 목소리가 지독한 침묵 속에서 유일한 위안이 될 때도 있었고, 가끔은 너무나 현실적인 경고에 질릴 때도 있었다.

“감마-7이라… 그쪽은 좀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위험도는 높지만, 이전 시대의 핵심 전력 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던 곳입니다. 코어 셀을 찾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역입니다.”
아리는 한숨을 쉬었다. 코어 셀. 그녀의 휴대용 공기 정화기와 생존 장비를 가동시키는 핵심 동력이자, 이 폐허에서 가장 귀한 물품 중 하나였다. 이제 몇 번 더 숨을 들이쉴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알았어, 그럼 감마-7으로 간다.”

아리는 낡은 지형 분석기로 경로를 확인했다. 감마-7 구역은 도시 외곽, 방사능 오염 지역과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길은 잿빛 모래 폭풍이 할퀴고 간 흔적들로 가득했고, 무너진 고가도로의 잔해가 거대한 뱀처럼 얽혀 있었다. 태양은 언제나 칙칙한 구름 뒤에 숨어 있었지만, 그 희미한 빛마저 뜨거웠다.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갈라진 도로 틈새에서 거대한 뿌리처럼 뻗어나온 금속성 덩굴들이 아리의 발목을 잡으려 했고, 녹슨 철골 구조물 사이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비상하는 ‘그림자 벌레’ 떼도 마주쳤다. 그림자 벌레는 빛을 싫어하고, 오직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는 사나운 변이체였다. 아리는 전술 칼의 날을 세우고, 칼끝에서 희미한 빛을 내어 그들을 쫓아냈다.

“모노, 주변 스캔.”
“생체 반응, 세 개체. 전방 300미터. 무장 상태 추정. 이동 경로 변경을 권고합니다.”
‘약탈자’들이었다. 다른 생존자들은 아리의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들은 먹을 것이나 귀한 물건을 찾아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아리는 재빨리 몸을 웅크려 무너진 버스 잔해 뒤로 숨었다. 숨을 죽이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들은 아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아리는 식은땀을 훔쳤다. 이런 일은 일상이었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아리는 감마-7 구역의 초입에 다다랐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훨씬 더 거대한 건물의 잔해들로 가득했다. 거대한 탑이 통째로 붕괴된 듯, 거대한 금속 파편들이 땅에 박혀 섬뜩한 기념물처럼 서 있었다. 공기는 금속성 먼지와 정체불명의 악취로 무거웠다.

“모노, 데이터 센터 입구 찾아.”
“지하 연결 통로를 통해 진입 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상보다 불안정한 구조입니다.”
아리는 모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환풍구였던 것으로 보이는 낡은 통로가 땅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간신히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아리는 주저 없이 몸을 숙여 통로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녹슨 철근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눅눅한 흙먼지가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어둠 속을 한참을 기어가자, 마침내 통로의 끝이 보였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때 서버 랙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을 이곳은 이제 잔해와 부서진 회로 기판들로 가득했다. 헬멧의 조명을 켜자, 사방에 널린 폐기물들이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코어 셀 반응, 미약하게 감지됩니다. 이 구역 깊숙한 곳입니다.” 모노가 속삭였다.
아리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는 녹슨 케이블들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고, 천장에서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아리의 발이 뭔가에 걸렸다. 거대한 금속 조각이었다.

그때였다. 쿵! 쿵!
어둠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아리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소리의 진동이 바닥을 타고 그녀의 몸으로 전해졌다.
“모노, 무슨…!”
“미확인 거대 생체 반응 감지! 빠르게 접근 중입니다!”
아리가 황급히 조명을 비추자, 믿을 수 없는 형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폐기물 골렘이었다. 버려진 로봇의 팔다리와 녹슨 철골, 부서진 회로 기판들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괴물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붉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가 아리를 향해 섬뜩하게 번뜩였다. 이곳을 지키는 존재였다.

폐기물 골렘은 굉음을 내며 아리를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금속 팔이 휘둘러지자, 낡은 서버 랙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아리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녀의 소지품이라고는 전술 칼과 소형 연막탄 몇 개, 그리고 비상용 EMP 수류탄 하나뿐이었다. 정면 대결은 자살행위였다.

“모노, 약점!”
“코어 부분에 과부하된 자기장 에너지 감지. 하지만 직접적인 공격은…”
아리는 주변을 둘러봤다. 폐허가 된 서버룸, 얽히고설킨 케이블들.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노, 내 움직임에 맞춰 전원부를 불안정하게 해봐. 내가 신호를 주면 터뜨려.”
“위험합니다, 아리! 최악의 경우, 이 구역 전체가 붕괴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

아리는 골렘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골렘의 움직임은 둔탁했지만 예측 불가능했다. 아리는 일부러 골렘을 낡은 전력선이 얽힌 곳으로 유인했다. 쿵! 쿵! 골렘의 발에 밟히자, 바닥에 깔린 케이블들이 스파크를 튀기기 시작했다.
골렘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를 쫓았다. 아리는 비상용 EMP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골렘이 거대한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아리는 외쳤다. “지금이야, 모노!”

동시에 아리는 EMP 수류탄의 핀을 뽑아 골렘의 가슴팍, 붉은 코어 부분이 빛나는 곳을 향해 던졌다.
수류탄이 터지자, 강력한 전자기 펄스가 골렘의 몸을 강타했다. 모노의 신호에 맞춰 주변의 전력선에서도 과부하가 일어났다.
찌이이잉! 골렘의 몸에서 굉음과 함께 수많은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붉게 빛나던 눈동자가 희미해지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골렘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거대한 몸체가 바닥에 부딪히며 엄청난 흙먼지를 일으켰다.

아리는 기침하며 폐기물 골렘의 잔해로 다가갔다. 심장이 여전히 격렬하게 뛰었다. 겨우 이겼다.
골렘이 쓰러진 자리, 부서진 금속 파편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물체가 보였다.
코어 셀이었다.

아리는 떨리는 손으로 코어 셀을 집어 들었다. 아직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모노, 찾았어.”
“축하드립니다, 아리. 잔여 에너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아리는 모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코어 셀을 꽉 쥔 채, 차가운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온몸은 땀과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낡은 방호복은 곳곳이 찢겨 있었다.
하지만 살았다. 또 하루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리는 코어 셀을 조심스럽게 수납함에 넣었다. 그녀는 이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싸워야 했다. 지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이 작은 승리들이 그녀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그녀의 생존은 작은 코어 셀 하나에, 그리고 그녀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지하 통로를 다시 기어 나오는 아리의 등 뒤로, 폐기물 골렘의 잔해들이 어둠 속에 잠겨갔다. 잿빛 대기가 기다리는 지상으로 올라서자,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여전히 세상은 황량하고, 앞날은 불확실했다. 하지만 손에 쥔 따스한 코어 셀이 전해주는 희미한 희망만큼은 분명했다. 그녀는 또 다시,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