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의 거대한 원형 경기장은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아니, 침묵이라기보다는 억눌린 함성, 고동치는 심장의 울림에 가까웠다. 금빛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흙먼지가 희미하게 춤추는 결투장 중앙에는 두 명의 고수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칼날보다 날카롭고, 그들의 기세는 거대한 산맥처럼 웅장했다.
나는 VIP 관중석 가장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무심하게’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 안의 모든 감각은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 기의 흐름 한 가닥까지 놓치지 않고 꿰뚫고 있었다. 저게 바로 이 세계의 ‘진정한 무(武)’였다. 내가 이 낯선 세상에 떨어진 지 벌써 3년. 처음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천하의 운명이 내 어깨에 걸린 무림 대회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작 20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가, 졸지에 이세계의 ‘무림 고수’가 되어야 하다니.
“강휘 공자, 다음은 공자의 차례입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무림맹의 집사장이 예를 갖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저들이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내 차례가 다가오는 것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졌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긴장과 기대감으로 들끓었다.
내 상대는 ‘질풍검(疾風劍)’이라 불리는 흑영문의 문주, 오대산이었다. 이름 그대로 바람처럼 빠르고, 그림자처럼 예측 불가능한 검법으로 정평이 난 인물. 전 대회에서도 8강까지 진출했던 강자였다. 그가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검은 도포 자락이 스치며 차가운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는 듯했다. 수많은 관중들이 그의 등장에 술렁였다. 저마다 그의 승리를 점치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결투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흙먼지가 발에 밟히는 감각이 생생했다. 정면에 선 오대산은 나를 보며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경멸보다는 호기심, 혹은 알 수 없는 탐색의 눈빛이었다.
“강휘 공자, 명성이 자자하더이다. 허나 젊은 나이에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이 그리 만만히 볼 일은 아닐 터.”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깔려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내공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벌써부터 기선 제압을 노리는 듯했다.
나는 말없이 허리에 찬 목검을 뽑아 들었다. 이 세계에 온 이후, 나는 굳이 진짜 검을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 기술은 무기가 아니라 ‘기(氣)’ 그 자체에 있었으니까. 목검은 내 기를 흘려보내는 매개체일 뿐.
“말씀은 감사하지만, 승부는 기세로만 정해지지 않는 법.”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차분했다. 어쩌면 이세계 생활 3년 만에, 나도 꽤나 능글맞은 무림인이 된 건지도 모른다.
오대산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는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검을 뽑았다. 새까만 검신에는 음습한 기운이 서려 있었고, 뽑아내는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칼날에 비친 햇빛이 섬뜩하게 반짝였다.
“그럼, 어디 한번 겨뤄봅시다!”
그의 외침과 함께, 오대산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 내 시야에서 잠시 벗어난 것이었다. 그의 잔상이 비무장 곳곳에 일렁이는 듯했다.
콰앙!
내가 서 있던 자리의 흙바닥이 깊게 패였다. 등 뒤에서 느껴진 살기,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검날의 섬뜩한 소리.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했지만, 목검으로 받아낸 일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묵직한 충격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검에는 단순한 속도 이상의 무언가가 실려 있었다. 흑영문의 독특한 내공이 만들어내는 진동과 파괴력이 더해진 일격이었다.
‘빠르군. 정말 빠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오대산은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시시각각 방향을 바꾸며 나를 압박해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예측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며 쇄도하는 검은 마치 수십 개의 검이 동시에 공격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관중들은 그의 신기에 가까운 검술에 탄성을 질렀다. 그들의 눈에는 오대산의 검이 거의 허공을 가르는 섬광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3년간, 아니, 이 몸에 빙의한 후 얻게 된 능력들은 이런 식의 ‘기술’ 싸움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내 눈에는 그의 검이 단순한 ‘빠른’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았다. 기의 흐름, 근육의 수축과 이완, 심지어 공기의 미세한 떨림까지 모두 읽어냈다.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쉬이이익- 퍽!
오대산의 검이 내 옆구리를 스치려는 순간, 나는 몸을 비틀며 그의 손목을 목검으로 쳐냈다. ‘팅!’ 하는 짧은 금속음과 함께 그의 검이 궤도를 이탈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은 무림의 기본 중의 기본. 하지만 그 ‘빈틈’을 읽어내는 것은 재능이었다.
“크윽!”
오대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그의 공격을 완벽히 읽고 반격할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내 목검 끝에는 푸른빛 기운이 서려 있었다. 평범한 목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강(劍罡)’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었다. 무림에선 최소한 고수의 경지에 올라야 다룰 수 있는 힘. 하지만 내 검강은 그보다도 더 순수하고 강력했다.
나는 목검을 검처럼 휘두르지 않았다. 도리어 창처럼, 혹은 곤봉처럼 휘둘렀다. 기를 담은 목검은 공기를 가르고 맹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오대산은 급히 검을 세워 방어했지만, 그의 검은 내 목검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그의 발이 흙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이게… 무슨…”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눈빛에는 내가 가진 힘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듯한 강렬한 탐색이 가득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내딛어 오대산을 몰아붙였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마치 거대한 폭풍 같았다. 단순한 무학의 경지를 넘어선, ‘무형의 힘’이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목검이 춤을 추는 듯했다. 한 번 휘두르면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했고, 한 번 찌르면 대기가 찢어지는 듯했다.
오대산은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그의 ‘질풍검’은 내 기세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검에서는 더 이상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깊은 불안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결국 그는 크게 뒤로 물러나 숨을 헐떡였다. 그의 등 뒤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무공은… 본 적이 없다!”
그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평생 무림에서 갈고닦은 지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묵묵히 목검을 앞으로 겨눴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 경지에서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려면,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어야 했다. 내 목검 끝에서 푸른 기운이 더욱 짙게 피어났다. 마치 살아있는 용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강휘 공자, 이 정도인가!”
오대산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온몸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나더니, 그를 감쌌다. 마치 수많은 그림자들이 겹쳐진 듯한 형태. ‘흑영검막(黑影劍幕)’! 그의 필살기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내공을 짜내어 최후의 방어를 구축하려 했다. 검은 장막이 그의 몸을 완벽하게 가렸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것조차 느리게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온몸의 기를 목검 끝으로 집중시켰다. 푸른 용이 포효하는 듯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대기가 무겁게 눌리는 듯한 압력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간다.”
낮은 한마디와 함께, 나는 목검을 휘둘렀다. 단순히 휘두른 것이 아니었다. 공간 그 자체를 베어 가르는 듯한, 압도적인 기의 폭풍이었다.
**파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푸른 기운의 목검이 오대산의 흑영검막을 꿰뚫었다. 종잇장처럼 찢겨나간 검막. 오대산은 충격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의 검은 멀리 날아가 바닥에 박혔고,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웅크렸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게 할 만큼의 압도적인 패배였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절망,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비무장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경악과 전율이 뒤섞인, 웅성거림조차 삼켜버린 정적. 모든 관중들의 시선이 나에게 박혔다. 심판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강휘 공자, 승리!”
그제야 관중석에서는 터져 나올 듯한 환호성과 탄성이 쏟아졌다. 수많은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선들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목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승리는 당연한 결과였다. 이 몸의 능력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으니까. 어쩌면 내가 이세계에 온 이유 자체가 이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쓰러진 오대산에게 다가갔다. 그는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에는 패배자의 좌절감보다 더 깊은,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그의 목소리는 기가 다 빠진 듯 힘이 없었다.
나는 미미하게 웃었다.
“그냥, 평범한 강휘입니다.”
그리고는 경기장을 나섰다.
관중석을 빠져나와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는데, 익숙한 인영이 앞을 가로막았다. 황금빛 도포를 걸친, 무림맹의 차기 맹주 후보 중 한 명인 ‘천룡검’ 이한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비스듬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방금 전의 오대산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날카롭고, 지극히 계산적이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훌륭하군, 강휘. 이 정도일 줄이야.”
그의 목소리는 칭찬이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까웠다. 그에게서는 나에게서와는 또 다른 종류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멈춰 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덕분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한 공자.”
이한은 피식 웃었다.
“좋은 경험? 하. 자네가 상대한 건 고작 8강급의 문주였다. 이 대회는 그리 만만하지 않아. 천하의 운명이 걸린 싸움, 그 진정한 무게는 이제부터 시작될 거야.”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오대산은 강자였지만, 이 대회의 우승 후보들과는 격차가 있었다. 이한은 그중 한 명이었고, 어쩌면 나보다도 더 강할지도 몰랐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기회가 기대되는군요.”
이한은 내 대답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는 어깨 너머로 한 마디 툭 던졌다.
“너무 자만하지 마라. 자네의 그 정체불명의 무공이 어디까지 통할지, 나 또한 지켜볼 테니.”
나는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정체불명이라… 이 세계에는 없을 테니, 당연한 반응일 터. 그의 말대로,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천하의 운명이 걸린 이 무림 대회의 결승에서, 과연 누구를 마주하게 될까. 어쩌면 그게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인 근본적인 ‘운명’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나의 이세계 전생은 이제 막 시작된 거대한 서사의 서막에 불과할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