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낡은 아파트 단지는 밤이 깊어질수록 거대한 숨을 내쉬는 듯했다. 높고 낮은 건물들 사이로 빽빽하게 불이 켜진 창문들은 저마다 다른 삶의 조각들을 품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지혜의 6층 창문은 유난히 아늑한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남산타워와 수없이 점멸하는 차량들의 불빛이 보였다.
지혜는 퇴근 후 어질러진 거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과 씨름하며 지친 몸은 한없이 무거웠다. 텅 빈 방 안에는 오직 냉장고의 낮은 웅웅거림만이 지혜의 피로를 부추기는 듯했다. 저녁은 대충 배달 음식으로 때웠고, 이제 남은 건 미뤄뒀던 설거지뿐이었다. 하지만 지혜의 손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아… 귀찮아라.”
작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주방 쪽에서 ‘딸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혜는 살짝 눈을 떴다. 설거지통에 쌓아둔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벌써? 물이 다 식었을 텐데.’ 의아했지만, 피곤함이 더 컸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마 바람 때문이겠지, 생각했다. 오래된 아파트니까.
다음 날 아침. 지혜는 알람 소리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어제 마시다 만 물컵이 협탁 위에서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내가 어디다 뒀더라?’ 침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웬걸, 컵은 주방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심지어 깨끗하게 씻겨서 말라 있었다.
“어…? 내가 어제 설거지했나…?”
멍하니 컵을 집어 들었다. 어제 분명히 컵을 씻지 않고 잠들었다. 지혜의 기억은 정확했다. 밤새 누가 들어와서 컵을 씻어놓고 간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마 피곤해서 자기도 모르게 씻어놓고 잊어버린 것이리라.
하지만 그 후로도 기이한 일들은 계속 이어졌다.
화장실에서 칫솔이 항상 제자리에서 2cm 정도 오른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서랍 속에 넣어둔 양말 한 짝이 다음 날 아침에는 빨래 건조대 위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가장 압권은 거실 화분에 심어둔 몬스테라였다. 지혜가 아무리 노력해도 새 잎을 내지 못하고 시들시들해 보이던 그 몬스테라가, 어느 날부터인가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게다가 화분은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창가로 옮겨져 있었다. 지혜는 한 번도 옮긴 적이 없었다.
“으음… 이건 뭐지?”
어느 날 저녁, 지혜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 어제저녁에 마지막 하나를 먹어치웠던 요구르트가 가지런히 세 개나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유통기한도 넉넉한 새것이었다. 지혜는 잠시 굳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냉장고 문을 닫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혼자 사는 아파트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니.
처음에는 도둑을 의심했다. 하지만 귀중품은 단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없던 물건이 생기거나, 엉뚱한 것이 제자리를 찾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숨겨진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소름 끼치는 생각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지혜는 결국 용기를 냈다. 거실 한복판에 서서 두리번거렸다.
“저기… 혹시 여기, 저 말고 누가 있어요?”
침묵.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없었다. 지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역시 내가 너무 피곤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볼펜 한 자루가 ‘또르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지혜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헉! 너, 너 누구야!”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흥미가 솟아났다. 진짜 있었어? 내 착각이 아니었어?
그날 이후로 지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교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존재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차 대담해졌다.
“저기, 혹시 내 안경 못 봤어? 아침부터 없어졌네.”
지혜가 출근 준비를 하면서 중얼거리면, 몇 분 뒤 안경은 항상 찾기 쉬운 곳에 놓여 있었다. 침대 머리맡이라든가, 식탁 위라든가. 때로는 출근길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스마트폰이 외투 주머니에서 짠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한번은 지혜가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었다. 상사에게 깨지고, 거래처와의 일도 꼬여서 온몸이 쑤시는 듯했다. 지혜는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한숨만 쉬었다. 저녁 식사도 건너뛰고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그때였다. 주방에서 ‘탁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혜는 지친 눈으로 겨우 고개를 들었다. 주방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식탁 위에는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이 놓여 있었다. 지혜가 평소에 즐겨 마시던 허브차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접시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비스킷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혜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컵과 비스킷을 번갈아 보았다. 따뜻한 차에서 은은한 향기가 피어났다. 지혜는 조심스럽게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몸속으로 온기가 퍼지는 듯했다. 초콜릿 비스킷도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하고 달콤했다.
“고마워….”
지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존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지혜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 후로 지혜의 아파트는 이전보다 훨씬 더 활기차고, 때로는 유쾌한 공간이 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옷이 벗겨져 있던 적은 거의 없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침대 위에 잠옷이 깔끔하게 개어져 놓여 있었다. 지혜가 늦잠을 자는 날에는 알람 소리에 맞춰 부엌에서 냄비 뚜껑이 ‘딸랑’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그러면 지혜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는 늘 지혜의 물건들로 어질러져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필요한 서류는 항상 가장 위에 놓여 있거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때로는 지혜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으면, 거실 스피커의 볼륨이 미세하게 커지기도 했다.
지혜는 이제 더 이상 그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한 동거인처럼 여겼다. 이름도 없는, 보이지 않는 존재. 하지만 그 존재는 지혜의 일상에 작은 기적과 같은 순간들을 선물해주고 있었다.
어느 비 오는 주말 오후, 지혜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운치를 더했다. 갑자기 무릎 위에 덮고 있던 담요가 스르륵 내려가는가 싶더니, 살짝 위로 올라오며 지혜의 어깨까지 부드럽게 덮어졌다. 지혜는 따뜻한 담요를 고쳐 잡고는 푸스스 웃었다.
“고맙다, 친구.”
지혜는 조용히 말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 순간 아파트 안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창밖의 잿빛 도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지혜의 작은 아파트 안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지혜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그녀의 일상 속에는 언제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함께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길이 스치는 기분 좋은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