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균열
이지훈은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17층짜리 아파트 복도를 걸었다. 하루 종일 시달린 회의와 마감의 압박은 낡은 운동화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철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자, 익숙한 전자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삑, 삐비빅. 고작 스무 평 남짓한 이 공간이 지훈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서울 한복판,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회색 건물들 틈에 박힌 그의 아파트는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한 겹의 막을 형성해 주는 존재였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지갑과 차 키를 아무렇게나 신발장 위에 던졌다. 차갑게 식은 공기가 훅 끼쳐왔지만, 그는 보일러를 켤 기운조차 없었다. 그저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져 세상 모든 근심을 잊고 싶을 뿐이었다.
“젠장, 피곤해 죽겠네.”
나직이 중얼거리며 넥타이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그 순간이었다.
딸깍.
작은 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갈랐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눈을 깜빡였다. 거실 한복판에 놓인 유리 테이블 위에는 그가 몇 시간 전 퇴근 직전 급히 정리하며 올려두었던 리모컨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가장자리에 있던 에어컨 리모컨이 탁자 아래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뭐지?”
지훈은 눈을 비볐다. 분명히 떨어질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꽤 평평한 테이블 위에 정중앙에 가까이 있었는데. 잠시 착각했나? 아니면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몸을 숙여 리모컨을 주웠다. 딱히 부서진 곳은 없었다.
“하, 역시 피곤하군.”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듯 중얼거리고는 리모컨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테이블 중앙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소파에 깊숙이 파묻혔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이 들락 말락 하는 몽롱한 상태에서, 지훈은 희미한 냉기를 느꼈다. 평소보다 더 차가운 것 같았다. 보일러를 켤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찌르르륵, 하는 미세한 전기음이 귀를 간질였다. 눈을 떴다. 거실 천장의 조명이 깜빡이고 있었다. 몇 번 더 찌르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던 조명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빛을 뿜었다.
“이거, 보일러만 문제가 아니라 전기도 문제인가?”
몇 달 전부터 보일러가 말썽을 부리더니, 이제는 조명까지? 입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아파트였다. 벌써부터 노후화가 시작되는 건가. 지훈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참에 관리실에 연락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번에는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고개를 돌렸다. 주방은 어두웠지만, 식탁 위에는 그가 아침에 먹다 남긴 컵라면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달그락’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걸까? 설마 쥐? 그는 잠시 긴장했지만, 이 아파트에 쥐가 산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세요?”
무심결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지훈은 스스로도 놀랐다. 집에는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도어락은 잠겨 있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사는 층은 15층이었다. 창문을 통해 침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상한 기척에 조금씩 잠이 달아났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방으로 향하는 짧은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불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그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싱크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컵들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던 유리컵 하나가 싱크대 가장자리까지 밀려 나와, 지금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
“이게… 뭐야?”
아침에 분명히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나왔는데. 지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컵을 만질 일도 없었다. 아침에는 커피 머그컵을 썼고, 컵라면은 종이 용기에 담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위태로운 유리컵을 잡았다. 컵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마치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것처럼. 이상한 한기. 컵을 제자리에 옮겨 놓으려는데, 문득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시선.
지훈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 서늘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거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선은 느껴졌다. 어둠 속에 잠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섬뜩한 확신.
“누, 누구세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주방 쪽을 돌아보니, 이번에는 싱크대 상부장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그릇들이 잔뜩 쌓여 있는 상부장이었다. 아침에 분명히 닫고 나왔을 텐데. 닫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결벽증까지는 아니어도, 정리에 꽤 신경 쓰는 편이었다.
상부장 안쪽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지훈은 문틈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희미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간 찰나의 순간이라, 환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변 공기가 훅 하고 차가워졌다. 에어컨을 최저 온도로 틀어 놓은 것 같은 냉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 지훈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오한이 들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뭐…야. 대체… 뭐야?”
그때였다. 닫혀 있던 냉장고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끽- 끽- 하고 낡은 경첩 소리를 내면서. 안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주방을 어스름하게 비췄다. 지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광경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오감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이 생생했다.
냉장고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안쪽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어제 사다 놓은 식료품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아주 작고 낮은, 마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아주 희미하고 바람 같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지훈의 모든 털이 곤두섰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현상을 피곤함이나 기계 오작동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차가운 손으로 목덜미를 잡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에,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때, 냉장고 안쪽에 놓여 있던 유리병 하나가 천천히 기울어지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차가운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고, 지훈의 바지 자락에도 몇 방울 튀었다.
지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현관으로 달렸다. 이성적인 사고는 이미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지배했다. 문고리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거실 천장의 조명이 다시 찌르르륵 거리더니, 이내 완전히 꺼져버렸다.
어둠. 칠흑 같은 어둠이 아파트를 집어삼켰다. 냉장고에서 새어 나오던 희미한 불빛마저 사라진 완벽한 어둠 속에서, 지훈은 벽에 부딪히며 휘청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명확하게 들려왔다.
‘이 집은… 내 거야.’
차가운 속삭임이 바로 귓가에 들렸다. 마치 누군가 그의 어깨에 입을 대고 말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지훈은 등골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 속에서, 겨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의 환한 불빛이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봤다. 닫힌 철문 너머로, 자신의 아파트가 어둠에 잠긴 채 서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곳은 그가 알던 안식처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의 집에 침입해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