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한 햇살이 내려앉은 오후, 윤지아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퍽퍽 때렸다. 세 번째 면접 탈락. 이번엔 정말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늘 같았다. 하필이면 방금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엎어서 흰색 블라우스에 진한 얼룩을 남겼다. 완벽한 파멸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나지막이 욕설을 읊조리며 구겨진 이력서 뭉치를 들여다봤다. 불운의 아이콘이 분명했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 낯선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왠지 모르게 끌리는 기분이었다. 길모퉁이를 돌자 낡았지만 어딘가 운치 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 고물상’. 유리창 너머로 먼지 쌓인 온갖 잡동사니들이 보였다. 이런 곳이 아직도 있다니.
지아는 홀린 듯 가게 문을 열었다. 낡은 풍경 소리가 짤랑, 하고 울렸다.
“저기요, 혹시… 사람 있어요?”
가게 안은 햇살조차 침투하기 어려운 어둑시니 같은 분위기였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섞여 독특한 향을 풍겼다. 그때, 덩치 큰 책장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업 중입니다.”
키가 훤칠하고 꽤 말끔한 남자가 책장 사이에서 나타났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무표정한 얼굴, 얇은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빛. 고물상 주인이라기엔 너무 시크한 분위기였다. 마치 오래된 그림에서 튀어나온 도련님 같았다.
지아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아… 죄송해요. 그냥 구경 좀….”
남자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책장 뒤로 사라졌다. 지아는 멋쩍게 웃으며 가게를 둘러봤다. 고대 유물 같은 항아리부터 삐걱거리는 낡은 의자, 빛바랜 사진첩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제각기 사연을 품은 듯 놓여 있었다.
그러다 지아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가게 한가운데 놓인 낡은 진열장 위, 먼지가 수북이 쌓인 작은 손거울. 손잡이 부분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지만, 거울 면은 뿌옇게 흐려져 제 모습을 비추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이끌렸다.
“이거 얼마예요?”
지아는 조심스럽게 거울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에 닿는 감촉이 묘했다.
“그건… 팔지 않는 물건입니다.”
남자가 어느새 지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지아는 화들짝 놀라 거울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잇, 깜짝이야! 귀신인 줄 알았네요!”
“귀신이라면 제가 여기 있을 리 없겠죠.” 남자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 거울은 가게 물건이 아닙니다. 제가 소장하는… 연구 중인 물건이라.”
“연구요? 고물상 사장님이 뭘 연구해요?”
지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거울을 요리조리 살폈다. 오래된 거울 면에는 얇은 긁힘 자국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말씀드리기 좀 곤란합니다. 돌려주십시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지아는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아, 제가 뭐 훔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어? 이거 왜 이래?”
그때였다. 지아의 손에 들린 거울이 갑자기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뿌옇던 거울 면이 거짓말처럼 깨끗해지며, 빛을 머금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는… 지아 자신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장면이 비쳤다.
거울 속 지아는 블라우스 대신 번쩍이는 황금 수트 차림으로 거대한 회사 건물의 꼭대기 층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테이블에는 면접관들의 목이 박제되어 장식되어 있었다! 지아가 깔깔거리며 웃자, 금색 명함이 허공에서 쏟아졌다. 명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윤지아, 대우주최고그룹 총수’.
“어? 이게 뭐야?”
지아는 놀라서 눈을 비볐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진짜 현실 같았다. 그리고 현실의 그녀를 본 고물상 사장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너… 너 지금 대체 뭘 한 거야?!”
그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거울 속 장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뿌연 거울로 돌아왔다. 지아는 손에 땀을 쥐며 거울을 내려다봤다.
“저, 저도 몰라요! 그냥 만졌는데… 갑자기 막 빛나더니 이상한 게 보였어요!”
남자는 지아의 손에서 거울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상한 게 보였다고? 뭐가 보였습니까?”
“그, 그러니까… 제가 엄청 높은 회사 사장님으로 변해서… 면접관들 목이… 아무튼 엄청 성공한 모습이었어요!”
지아의 설명에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거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젠장. 기어이 깨웠군.”
“네? 뭘 깨워요? 이 거울… 마법 거울이에요?”
지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아를 바라봤다.
“마법이라는 단어는 좀… 비과학적이지만, 그런 류의 물건이라고 할 수 있죠. 정확히 말하면, 이건 ‘희망 반영 거울’. 고대 페르시아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물입니다. 소유자의 가장 깊은 욕망을 잠시나마 현실처럼 비춰주는 물건.”
“와아… 그럼 제가 진짜로 대우주최고그룹 총수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지아의 얼굴에 희망이 만개했다. 남자는 한숨을 또 쉬었다.
“아니요. 그냥 꿈을 비춰주는 것뿐입니다. 그 꿈이 현실이 될지는 당신 하기 나름이죠. 중요한 건, 이 거울은 특별한 계승자만이 잠금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굳게 봉인되어 있던 건데…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남자는 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지아는 그 시선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저 같은 사람이라니요? 제가 뭘 어쨌다고요! 그 잘난 마법 거울이 저한테만 반응한 거 아니겠어요? 사장님은 맨날 만져도 아무 일 없었잖아요!”
그녀의 반박에 남자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었다. 그는 몇 년 동안 거울을 연구했지만, 이렇게 강렬한 반응을 이끌어낸 건 지아가 처음이었다.
“음… 어쨌든, 당신은 이 거울을 깨웠고, 이제 나와 함께 이 거울의 힘을 다스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네? 왜 제가요?”
“왜냐하면… 거울이 당신에게 완전히 깨어났으니까요. 당신이 거울의 첫 번째 계승자입니다.” 남자는 왠지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게다가 당신이 너무 쉽게 깨워버려서, 가끔은 멋대로 발동할 수도 있습니다. 옆에 누가 있어야 통제할 수 있을 겁니다.”
“으으음… 그럼 사장님이 저를 책임져야겠네요!”
“제가 왜요?”
“제가 사장님 가게에 들어와서 거울을 만진 거잖아요? 그리고 사장님이 팔지 않는 물건이라고는 했지만, 아무 설명도 없이 저렇게 위험한 물건을 진열장에 놔둔 건 사장님 잘못 아닌가요?”
지아의 말에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논리가 엉뚱하면서도 일리가 있었다.
“이현우입니다. 달빛 고물상 사장.”
그는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지아는 밝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윤지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현우 씨!”
그 순간, 지아의 손에 들린 거울이 또다시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현우는 순간적으로 거울을 빼앗으려 했지만 늦었다. 거울 면에는 이번엔 현우의 모습이 비쳤다.
현우는 말쑥한 양복 대신 꽃무늬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촌스러운 빨간색 두건을 두른 채 낡은 트럭 위에 앉아 있었다. 트럭 짐칸에는 ‘달빛 고물상 이동 판매점’이라는 간판이 삐딱하게 달려 있었고, 그는 호객 행위를 하는지 길거리에서 요란하게 탬버린을 흔들며 외치고 있었다.
“자자, 어서 오십시오!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달빛 고물상! 오늘은 특별히 덤으로 짝퉁 도자기 드립니다! 이현우 사장의 파격 세일! 어서 오세요!”
현우의 얼굴은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가장 기피하는, 아마도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은 ‘자유로운 영혼의 길거리 상인’ 욕망이 거울에 비친 것이리라. 그 무뚝뚝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아는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현우 씨, 길거리 상인이라니! 완전 찰떡인데요? 탬버린도 너무 잘 어울려요!”
“닥쳐요!”
현우의 얼굴은 벌게졌다. 거울 속 장면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그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지아는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웃음을 멈췄다.
“저,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 어쨌든, 앞으로 우리 이 마법 거울로 재미있는 일 많이 생기겠네요!”
현우는 팔짱을 끼고 지아를 노려봤다.
“재미있기만 할 것 같습니까? 내 연구는 이제 물 건너갔군. 앞으로 당신 때문에 제 수명이 깎여 나갈 것 같군요.”
“에이, 설마요! 제가 현우 씨의 잃어버린 웃음을 찾아줄지도 모르죠! 게다가… 저, 면접만 붙여주면 거울 안 만질게요!”
지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현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묘하게 그의 딱딱한 마음을 흔드는 것 같았다.
“일단… 면접부터 어떻게든 붙여 보시죠. 대우주최고그룹 총수는… 글쎄요.”
현우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지아는 그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불운한 하루는 마법 같은 만남으로 인해, 이제 막 예측 불가능한 로맨틱 코미디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달빛 고물상의 먼지 쌓인 진열장 위, 희망 반영 거울은 다시 조용히 빛을 머금고 있었다. 아마도 앞으로 이 두 사람의 가장 황당하고도 달콤한 욕망을 비춰줄 순간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