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대지 위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흙먼지와 메마른 공기가 스며들었다. 이안은 낡은 가죽 조끼의 깃을 더욱 바싹 여몄다. 수십 년 전, 세상이 ‘멸망의 재앙’이라 불리는 거대한 균열로 뒤덮이기 시작한 이래로, 모든 날은 회색이었고 모든 순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냥은 언제나 그랬듯 고독하고 위험했다. 앙상한 나무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는 황무지를 가로지르며, 이안의 눈은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조악하게 다듬어진 것이었지만, 여러 번 그의 목숨을 구해준 동반자였다. 끝이 뭉툭한 쇠 조각을 박아 넣은, 투박한 사냥 도구.

“젠장, 아무것도 없군.”

나지막한 혼잣말이 바람에 흩어졌다. 며칠째 식량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들개 몇 마리를 잡았지만, 썩어가던 고기는 며칠 버티지 못했다. 그의 배에서는 굶주림의 고통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은 또다시 차가운 허기로 지새워야 할 터였다.

그때였다. 흙바닥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크고 불규칙적인 형태. 짐승의 것이 분명했지만, 이안이 아는 어떤 것과도 달랐다. 멸망 이후, 세상은 기이한 변이를 겪었고,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괴물들이 황무지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일 터였다.

이안의 눈빛이 살기로 번뜩였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굶주림은 그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발자국은 척박한 땅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뒤쫓았다. 낡은 장화가 바스락거리는 마른풀을 밟고 지나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파고드는 찬 공기에 온몸이 오싹거렸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따라갔을까. 황무지 한가운데에 솟아난 거대한 바위산 아래, 거무튀튀한 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주변에는 짐승의 털과 뼈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이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히 그가 찾던 짐승의 소굴이었다.

그는 몽둥이를 고쳐 쥐고, 동굴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축축한 습기와 비린내가 새어 나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이안은 낮은 자세로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벽에는 간신히 앞을 가늠할 정도의 희미한 룬 문자 같은 흔적들이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과거의 문명, 멸망 전의 세계가 남긴 유산일지도 몰랐다.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스스슥. 바닥을 기는 소리였다. 이안은 발소리를 죽이고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사냥꾼이 아닌, 사냥감이 될 수도 있다는 차가운 불안감이 그의 목을 조여 왔다.

“크르르르…….”

낮고 굵은 ры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동시에 번쩍이는 두 개의 붉은 눈이 이안을 향했다. 놈은 거대한 거미와 같은 형태였다. 여섯 개의 다리에는 날카로운 갈고리들이 돋아 있었고, 등에는 단단한 껍질이 박혀 있었다. 온몸을 뒤덮은 검은 털 사이로 희미한 푸른빛이 번뜩이는 짐승, 흔히 ‘그림자거미’라 불리는 놈이었다. 독액을 뿜는 것으로 악명 높은 괴물이었다.

그림자거미는 이안을 발견하자마자 거대한 몸을 이끌고 돌진했다. 놈의 송곳니에서 비릿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져 공격을 피했다. 거대한 몸뚱이가 그의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벽에 부딪혔다. 콰광!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위 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렸다.

“이 빌어먹을!”

이안은 빠르게 자세를 잡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몽둥이가 놈의 다리 하나를 후려쳤지만, 단단한 껍질에 부딪혀 팅겨 나갔다. 놈은 잠시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곧 다시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이안은 계속해서 그림자거미의 공격을 피하며 동굴 안쪽으로 유인했다. 좁은 공간에서는 놈의 거대한 몸이 오히려 약점이 될 터였다.

퍽! 퍽!

그림자거미는 이안의 움직임에 짜증이 난 듯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놈의 독액이 바닥에 떨어져 하얀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안은 숨을 참으며 놈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놈이 몸을 돌리는 찰나, 이안은 전력을 다해 몽둥이를 휘둘러 놈의 배 아래쪽, 비교적 부드러운 부분을 강타했다.

크아악!

기분 나쁜 비명소리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그림자거미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었다. 이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온 힘을 실어 몽둥이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놈의 다리 관절 부분을 정확히 노렸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 하나가 꺾여 버렸다. 놈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결국 옆으로 쓰러졌다.

이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쓰러진 그림자거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붉은 눈이 이안을 노려보며 독액을 뿜어낼 준비를 했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쓰러진 놈의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마침내 그림자거미는 움직임을 멈췄다. 푸른빛이 사라진 붉은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이안은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몽둥이를 쥔 손이 아직도 떨렸다. 전신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는 그림자거미의 거대한 몸을 살폈다. 독액을 피해 비교적 온전한 부분을 잘라냈다. 귀한 단백질이었다. 한동안은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고된 작업 끝에 그는 겨우 먹을 만한 살점을 챙겨 동굴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은 멸망 전의 세상에서는 아름다웠을 색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을 더욱 강조할 뿐이었다.

축축하고 비릿한 고깃덩이를 짊어지고 이안은 척박한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어딘가 모를 만족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앞으로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라는 희미한 희망. 그것만으로도 이 황폐한 세상에서는 충분한 보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일은 또 무얼 찾아야 할까. 며칠 후엔 또 어떤 괴물과 맞서야 할까. 그리고 이 끝없는 생존의 연대기는 언제쯤 끝이 날까.

하늘 저편, 멸망의 재앙이 만들어낸 거대한 균열의 그림자가 대지를 덮는 가운데, 이안은 그의 임시 거처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그때였다. 잿빛 하늘을 가로지르며 섬광이 번뜩였다. 마치 고대 신화 속 별똥별처럼, 그것은 빠르게 대지를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이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눈이 번뜩이는 빛을 쫓았다. 저것은… 대체 무엇일까. 새로운 재앙일까, 아니면 이 암흑 같은 세상에 드리운 한 줄기 빛일까. 불길한 예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