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이 무겁게 들렸다. 희미한 흙먼지 냄새와 눅눅한 나무 냄새. 눈을 깜빡이자 뿌연 시야에 어설픈 서책 몇 권과 빛바랜 붓, 그리고 검게 그을린 촛대가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 어젯밤 야근 후 집에 돌아오다 트럭에 치인 것 같은데. 마지막 기억은 굉음과 함께 덮쳐오던 거대한 불빛이었다.
“흐읍… 으윽…”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목재로 지어진 초라한 방이었다. 벽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창호지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 구름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는 산봉우리들.
‘이게… 꿈인가?’
환상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제 손을 내려다봤다. 핏줄이 도드라진 거친 손. 그리고… 왜소하다 못해 볼품없는 몸뚱이. 김현우, 서른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내 몸이 아니었다. 혼란 속에서 머릿속에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이진우… 청운문… 사부님…’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이 세상, 무림이라고 불리는 곳의 ‘이진우’라는 이름의 몸에 들어온 것이다. 이진우는 청운문이라는 몰락한 문파의 마지막 제자였다. 재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천치에 가까운 아이. 간신히 살아남은 문파의 유일한 희망은 늙고 병든 사부, 묵호 사부님 뿐이었다.
“진우야, 깨어났느냐?”
그때 삐걱이는 문이 열리며 주름진 얼굴의 노인이 들어섰다. 묵호 사부였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눈빛은 자애로웠다.
“사, 사부님…”
제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낯설었다. 어리고, 가늘고, 힘이 없었다. 사부는 제 이마를 짚었다. 차가운 손길이었지만,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졌다.
“열은 없구나. 며칠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으니, 놀랍게도 살아난 것이 기적이로구나.”
사부의 얼굴에는 안도와 함께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부님, 제가… 쓰러져 있었습니까?”
“그래. 네가 산길을 헤매다 독초를 잘못 건드려 쓰러진 것을 내가 발견했다. 하마터면…”
사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멀리 산등성이 너머를 향했다. 그 시선 끝에는 걱정이라는 감정 말고도, 희망과 함께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진우야. 네게 할 말이 있다.”
사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제 몸속의 이진우의 기억은 이곳이 청운문이라는 이름만 남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초라한 문파임을 알려주었다. 이진우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사부에게 거둬져 자랐다. 무공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마음만은 착한 아이였다.
“십 년에 한 번 열리는 천하제일 무도대회가 곧 시작된다.”
천하제일 무도대회. 그 이름에 현우의 기억이 번뜩였다. 이진우의 기억 속에서도 그 이름은 최고의 무인들이 모여 천하의 패권을 가르는 대회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다르다. 단순히 문파의 위명을 드높이는 자리가 아니다.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대회가 될 것이다.”
사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현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신(魔神) 강림의 때가 임박했다.”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마신? 전설이나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가 정말로?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던 마신이 다시 깨어나고 있다. 그의 재림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천룡비보(天龍秘寶)의 힘을 빌리는 것뿐이다.”
천룡비보. 현우의 머릿속에 또 다른 낯선 단어가 박혔다.
“천룡비보는 오직 천하제일 무도대회의 우승자만이 다룰 수 있다. 그에게 천룡의 기운이 깃들어, 봉인의 힘을 강화할 수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사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하여… 네가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
현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제가? 재능 없는 이진우의 몸으로?
“사부님, 저는… 저는 무공에 재능이 없습니다. 겨우 검의 모양새나 낼 수 있을 뿐… 그런 제가 어찌 그 강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안다. 나도 안다, 진우야. 허나… 이번 대회는 단순히 힘만으로 우승자를 가리지 않는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천룡비보는 진정한 ‘무심(武心)’을 지닌 자를 택한다고 한다. 천룡의 뜻을 이해하고, 천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자… 그런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무공이다.”
사부의 말을 듣는 순간, 현우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차올랐다. 무심이라… 현대 사회에서는 볼 수 없던 개념이었다. 오직 경쟁하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지난 삶과는 전혀 다른 가치였다.
“네 안에는 맑고 선한 마음이 있다, 진우야. 비록 네 무공은 미숙할지라도, 네가 가진 마음이라면…”
사부의 눈빛에서 강렬한 믿음이 읽혔다. 그 믿음에, 현우는 차마 반대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현우 본인도 이 낯선 세상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살아볼 가치가 있는 삶을 살고 싶었는지도.
“사부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현우는 묵호 사부의 지도로 기초 무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이진우의 몸은 약골이었지만, 묘하게도 전생의 김현우가 가지고 있던 날카로운 관찰력과 분석력이 무공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부가 가르쳐주는 정형화된 초식을, 현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했다.
‘이 자세는 무게 중심이 이렇게 이동해야 안정적이야. 그리고 저 상대의 빈틈은… 일종의 확률적 예측이 가능한 구간인가?’
수십 년간 쌓인 사부의 경험과 현우의 현대적 분석 능력이 기묘하게 섞였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한심할 정도로 느려 터진 진도였지만, 현우는 매일 밤낮으로 수련에 매달렸다.
시간은 흘러, 마침내 천하제일 무도대회가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대회는 무림의 성지라 불리는 ‘천산(天山)’의 광활한 평원에서 개최되었다. 거대한 경기장이 우뚝 솟아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무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각 문파의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위세를 뽐냈다.
“청운문 이진우! 나와라!”
현우는 제 이름이 불리자 침을 꿀꺽 삼켰다. 사부는 담담한 표정으로 제 어깨를 두드렸다.
“두려워 말거라. 네 마음을 보여주면 된다.”
경기장에 들어선 현우의 눈앞에는 거대한 덩치의 무인이 서 있었다. 그는 거친 털이 무성한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고, 손에는 육중한 철퇴를 들고 있었다. ‘흑풍문’의 일원이라고 했던가.
“하하하! 청운문이라고? 그 이름도 가물가물한 잡문파에서 출전한 꼬맹이가 감히 이 흑룡(黑龍)을 상대하려 하다니!”
상대는 코웃음을 쳤다. 주변에서 비웃음 섞인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모욕은 이진우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현우 본인의 것이기도 했다.
“준비… 시작!”
심판의 외침과 동시에 흑룡은 육중한 철퇴를 휘두르며 현우에게 달려들었다. 철퇴가 바람을 갈랐고, 그 기세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울렸다. 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녀석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타입. 빈틈은 크지만, 그만큼 파괴력도 엄청나다. 정면으로 받아내려다간 뼈도 못 추릴 거야.’
현우는 빠르게 몸을 틀어 철퇴를 피했다. 흑룡의 공격은 단순했지만,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철퇴를 연이어 휘두르며 현우를 압박했다.
“이 겁쟁이 녀석! 도망만 다닐 셈이냐!”
현우는 흑룡의 공격을 피하면서 그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왼쪽 어깨의 미세한 흔들림… 저건 다음 공격이 오른쪽으로 향한다는 신호. 오른 다리에 힘이 실리는 순간, 회전력이 극대화될 거야.’
현우는 흑룡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찰나, 몸을 날려 그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이진우의 무공은 초라했지만, 현우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무협지 속 고수들의 움직임과 현대 스포츠 과학의 원리가 혼재되어 있었다.
“어딜 감히!”
흑룡이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었지만, 현우는 이미 그의 뒤를 잡은 상태였다. 이진우의 가장 기본적인 검술인 ‘청운검법(靑雲劍法)’의 첫 번째 초식, ‘운무천리(雲霧千里)’는 원래 먼 거리를 공격하는 기술이었지만, 현우는 이를 짧게 응용했다.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흑룡의 허리를 강타했다.
“크윽!”
예상치 못한 공격에 흑룡은 휘청거렸다. 현우는 그대로 두 번째 초식, ‘비운낙엽(飛雲落葉)’을 연결했다. 본래는 상대를 베어 넘기는 기술이었지만, 현우는 검끝으로 그의 발목을 걸었다. 흑룡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거대한 덩치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경기장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거대한 흑룡을, 저 꼬마 같은 청운문의 제자가 쓰러뜨렸다고?
“승자, 청운문 이진우!”
심판의 외침에 경기장은 술렁거렸다. 현우는 숨을 헐떡이며 제 손에 들린 목검을 바라보았다. 해냈다. 겨우 첫 승리였지만, 마치 천하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흑룡의 패배는, 단순한 무인의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의 평범한 직장인이, 이세계의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딛은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앞에는 거대한 무림이 펼쳐져 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