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어둠을 가르는 칼날

한낮의 태양은 숨죽인 마을 위로 마치 피를 말리듯 뜨겁게 내리쬐었지만, 아벨의 눈은 그 열기에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멀리서 보이는 ‘오렌’ 마을은 흡사 거대한 짐승에게 뼈까지 발라 먹힌 시체 같았다. 며칠 전 제국 징세관들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은 마을 곳곳에 선명했다. 불탄 지붕, 부서진 문짝, 그리고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옅은 재와 절망의 냄새. 흙먼지 가득한 마당에는 며칠 전까지 곡식을 말리던 자리였을 터,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젠장… 저 썩어빠진 놈들.”

아벨의 곁에서 망원경을 내려놓던 리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단단한 턱선이 분노로 굳어 있었다. 리안은 아벨의 가장 오래된 동지이자,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거칠지만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전사였다.

“지난번엔 밭을 뺏어가더니, 이젠 아예 씨앗까지 털어갔군.” 아벨의 목소리도 깊게 가라앉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걸 말려 죽이려는 심산인가.”

그들의 뒤편, 암벽 그늘에 숨어 있던 카엘이 흥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대장! 지금 당장 내려가서 저 놈들의 목을 따야 합니다! 지난번에도, 지지난번에도…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카엘은 이들 중 가장 젊고 혈기왕성한 전사였다. 제국의 압제에 가족을 잃은 그는 불꽃 같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오렌 마을의 비극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제국 수도 ‘황금의 심장’에서 날아든 황제의 조서는 매번 백성들의 피를 쥐어짜는 내용으로 가득했고, 그 피는 고스란히 제국 귀족들의 배를 불리는 데 쓰였다.

아벨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다, 카엘. 하지만 무작정 달려들면 우리만 죽을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분노가 아니라, 살아남아서 싸울 수 있는 지혜다.”

“하지만 그 지혜를 기다리다간 모두가 굶어 죽을 겁니다!” 카엘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리안이 나섰다. “카엘, 진정해라. 대장의 말은 옳다. 며칠 전, 보급 수레를 노리다 실패해서 우리가 잃은 동지가 몇 명이었는지 잊었나? 그들은 무모해서 죽은 게 아니야.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던 탓이다.”

그 말에 카엘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뜨겁게 흔들렸다.

아벨은 다시 망원경을 들어 오렌 마을의 폐허를 바라봤다. 텅 빈 우물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여인의 모습, 허리띠를 졸라매고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노인의 그림자가 아벨의 심장을 짓눌렀다. 제국은 백성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여겼다. 세금을 내지 못하면 몸뚱이를 뜯어갔고, 밭에서 난 곡식을 수탈해 갔다. 그들이 남긴 것은 오직 절망뿐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어.’

아벨은 굳게 다짐했다. 그는 이 작은 반란군의 대장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굶주린 백성들의 희망과 고통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는 평범한 대장간 노동자였다. 그저 평화롭게 살고 싶었던 청년이었다. 하지만 제국은 그에게 망치를 내려놓고 칼을 들게 했다.

“리안, 지난번 정보를 다시 확인했나?” 아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대장. ‘검은 혀 협곡’을 지나는 제국 보급대가 있습니다. 내일 새벽, 세 대의 마차와 호위 병력 스무 명.”

“호위 병력 스무 명?” 카엘의 눈이 다시 빛났다. “그 정도라면…!”

“가볍게 볼 수는 없어.” 아벨이 카엘의 말을 잘랐다. “제국 기사단은 아니겠지만, 숙련된 용병들일 거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해.”

아벨은 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지도를 꺼냈다. 그가 대장간에서 일을 하던 시절, 몰래 훔쳐본 제국의 물류 경로가 표시된 지도였다. 닳고 닳아 구멍이 난 지도 위로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검은 혀 협곡은 병목 지점이다. 매복하기에 최적의 장소지. 보급품은 무엇이지?”

“주로 식량과 약초, 그리고 일부 광물입니다.” 리안이 대답했다. “귀족들의 사치품은 아닙니다만, 우리에게는 금보다 귀한 물건들입니다.”

“그래, 우리에게는.” 아벨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오렌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번엔 놓칠 수 없어.”

리안과 카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벨의 결연한 눈빛에서 확고한 의지를 읽었다. 그들이 따르는 대장은 때로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여린 구석이 있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강철 같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카엘, 너는 ‘날개’ 조를 이끌고 협곡 북쪽 절벽 위에서 낙석 준비를 해라. 최대한 많은 돌을 모아두고, 내가 신호를 보내면 한꺼번에 쏟아부어라.”

“알겠습니다, 대장!” 카엘의 얼굴에 드디어 활기가 돌았다. 복수심에 타오르던 눈빛은 이제 임무에 대한 집중으로 바뀌었다.

“리안, 너는 ‘늑대’ 조와 함께 협곡 중앙에서 후방을 막아라. 마차가 멈추는 즉시 기사들을 향해 돌격한다. 절대 보급품에 눈을 돌리지 말고, 오직 기사들의 시선을 붙잡아라.”

“걱정 마십시오, 대장. 제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아벨은 마지막으로 동지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피로와 굶주림, 그리고 절망 속에서 피어난 작은 불씨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바로 자신의 임무였다.

“나는 ‘독수리’ 조와 함께 선두 마차를 노린다. 그들은 경계가 느슨할 거야. 빠르게 제압하고, 다른 마차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아벨이 계획을 마무리했다. “명심해라, 동지들. 이번 습격은 단순히 보급품을 털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제국에 맞서 싸우는 우리가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거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희망을 보여주는 거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거대했다. 어둠이 드리운 협곡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내일 새벽, 이 바람은 제국의 오만함과 평민들의 절규를 함께 실어 나를 것이다. 아벨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그의 손아귀에 익숙하게 감겼다. 이 칼날이 어둠을 가르고 새로운 새벽을 가져올 수 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것.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들은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내일 새벽, 검은 혀 협곡은 피와 함성으로 물들 것이다. 제국의 심장을 향해 뻗어 나가는 작지만 강렬한 칼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