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오래된 그림자 속에서
서울의 빌딩 숲, 그 익숙한 회색빛 풍경 한가운데서 서유진의 작은 꽃집 ‘꽃내음’은 홀로 생기로운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은 온갖 꽃잎과 잎사귀 위에서 보석처럼 부서졌다. 그녀는 막 물을 준 백합 화분을 조심스레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옅게 피어나는 꽃잎의 미세한 떨림까지 놓치지 않았다. 유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 안에 깃든 작은 숨결마저 소중히 여기는.
“후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평화로운 오후였지만, 며칠 전부터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 혹은 기대감 같은 것이 맴돌았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낯선 노랫가락처럼, 자꾸만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처음에는 피곤해서겠거니 했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작업실에서 꽃을 다듬다가도, 새벽녘 꿈속에서도 그 알 수 없는 이끌림은 계속되었다.
특히 최근 들어 그녀의 발길이 닿는 곳이 있었다. 번화가에서 한두 골목만 벗어나면 나오는, 재개발 예정지로 지정되어 사람들 발길이 뜸해진 낡은 동네였다. 낡은 한옥들이 즐비하고, 그 사이로 자란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곳. 그곳에서도 유진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굳게 닫힌 낡은 사찰 대문 옆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였다.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그 나무는 고목特有의 굵고 깊은 주름을 온몸에 새긴 채,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고요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늘도 가볼까…”
유진은 머릿속으로 꽃집의 재고를 훑었다. 마침 동백나무 묘목이 하나 필요했다. 꽃집 근처에는 없는 품종이라 멀리 가야 했지만, 어쩐지 그 은행나무가 있는 동네의 작은 화원에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합리적인 핑계를 찾아낸 그녀는 앞치마를 벗어 걸었다.
버스에서 내려 낡은 동네 골목으로 접어들자, 도시의 번잡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낮인데도 어둑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래된 가로등은 녹슬어 있었고, 벽에는 빛바랜 벽화들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듯, 바닥에는 낙엽과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퇴락함 속에서 잊혀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익숙했다.
목적지인 작은 화원은 예상대로 닫혀 있었다. 유진은 살짝 실망했지만, 이내 다시 그 거대한 은행나무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닫힌 사찰의 대문 옆, 돌담을 따라 난 좁은 길을 따라 들어서자 은행나무는 더욱 위용을 드러냈다. 거대한 줄기는 마치 살아있는 역사를 담은 듯 우람했고,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며 푸른 잎사귀들을 너울거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알 수 없는 향기가 느껴졌다. 흙내음과 오래된 나무의 향기, 그리고… 뭔가 다른, 아주 희미하면서도 강렬한 향기. 유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마치 잊고 지냈던 어떤 감각이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바람 한 점 없던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가지와 가지 사이, 잎사귀의 푸른 그림자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은행나무의 일부인 양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곳에 존재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짙은 흑색 머리카락은 바람에 실려온 잎사귀 몇 조각과 함께 흩날렸고, 짙은 눈동자는 흡사 깊은 숲의 호수처럼 고요하면서도 신비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와 날렵한 턱선은 그림자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낡은 한복 차림이었지만, 그의 고결한 기품은 오히려 시대를 초월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유진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유진을 응시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누군가를 발견한 것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슬픔, 체념, 그리고…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호기심.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자,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도시의 소음도, 바람 소리도, 심지어 유진 자신의 심장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와 그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은행나무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적을 깨고 먼저 움직인 것은 그였다. 남자는 아주 느리게, 그러나 결연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은행나무의 가장 낮은 가지에 매달린, 시들고 있는 잎사귀 하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자, 죽어가던 잎사귀는 거짓말처럼 생기를 되찾고 푸른빛을 다시 머금었다.
그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유진은 황홀경에 빠진 듯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담긴 경외심과 연민은 인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마치 그가 저 나무의 숨결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다시 유진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눈빛에 경고의 빛이 스쳤다.
“돌아가.”
나직하고 묵직한 목소리. 마치 수천 년의 시간을 압축해 놓은 듯한 음성이었다. 유진의 심장이 또 한 번 크게 울렸다.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가 말했다. 돌아가라고.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다르게, 유진의 다리는 바닥에 단단히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더욱 강렬하게 붙잡는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시죠?”
용기를 내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했다.
남자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의 눈동자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그림자가 더욱 깊어지는 것을 유진은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인간이 머물 곳이 아니다.”
두 번째 경고였다. 그의 말은 위협적이기보다는, 마치 오랜 친구에게 주는 안타까운 충고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깊은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유진은 그가 인간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니, 정확히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분위기, 행동, 그리고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의 상식을 뒤흔들었다. 두려움보다는 강렬한 호기심과, 어쩐지 익숙한 슬픔이 그녀의 마음을 지배했다.
“저는…”
유진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남자의 시선이 문득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미세한 긴장감이 스쳤다.
“곧 사라져야 한다.”
그가 마지막 말을 남기자마자, 그의 형체는 마치 아침 안개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가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푸른 잎사귀와 어둠의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라져가는 그의 눈동자 속 깊이 자리한, 헤어짐에 대한 애틋한 연민이었다.
유진은 홀로 낡은 은행나무 아래에 남겨졌다. 불어오는 바람은 이제 그녀의 뺨을 스쳤지만, 방금 전까지 그가 내뿜던 낯선 향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손을 내렸다. 손끝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뛰는 심장 속에는 방금 전의 만남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돌아가라는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강렬하게 깨달았다. 다시 그를 만나야만 할 것 같다는, 피할 수 없는 이끌림을. 어쩌면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위험할지도 모를 그런 이끌림을.
그녀는 고요히 서 있는 은행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나무의 푸른 잎사귀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리고 유진은 그 빛 속에서, 또다시 그 남자의 그림자를 본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알았다. 이 도시의 숨겨진 그림자 속에서, 이제 그녀의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