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불청객
서윤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열었다. 도시의 밤은 차갑고, 회사 빌딩의 형광등은 끈질기게 눈을 괴롭혔다. 익숙한 번호, 익숙한 손맛. 찰칵, 하는 잠금장치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13층, 1304호. 고층 아파트의 한 칸은 그녀에게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가방을 아무렇게나 소파 위에 놓았다. 어둠 속에서 스위치를 누르자 거실의 메인 등이 환하게 켜졌다. 그제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작은 원룸형 아파트였지만, 서윤은 이곳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꾸며 놓았다. 창가에는 작은 다육식물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벽면에는 좋아하는 작가들의 그림 엽서들이 붙어 있었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공간. 최소한, 어제까지는 그랬다.
“후우…”
나직한 한숨과 함께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따뜻한 물 한 잔이 간절했다. 컵을 꺼내려 상부장을 열었을 때였다. 텅, 하는 소리. 마치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 들었나?’
피곤한 탓이겠지, 생각하며 물을 끓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을 켜자 아무 의미 없는 드라마 대사들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때였다. 찌익, 찌이익.
소파 뒤쪽 벽에서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낡은 건물도 아닌데 이런 소리가?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지어진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신축이었다.
“어… 누구세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 소리를 키웠다. 혹시 옆집에서 뭘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소음은 여전했다. 마치 못으로 벽을 긁어대는 듯한, 신경을 갉아먹는 소리. 등골에 오싹한 한기가 스쳤다.
‘옆집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릴 리가 없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벽에 귀를 대보니,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분명 이쪽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쪽, 바로 그녀의 거실 벽 안쪽에서. 하지만 곧, 소리는 뚝 끊겼다.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뭐야, 정말 피곤한가 보네.”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서윤은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따뜻했던 물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한결 개운했다. 축축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대강 말리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몸을 눕히려던 순간, 그녀의 시선이 머리맡 협탁에 닿았다.
‘분명 이쪽으로 놓았는데…’
협탁 위에는 그녀가 잠들기 전마다 읽는 소설책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평소 책이 놓여 있던 방향이 아니었다. 책등이 벽 쪽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항상 책등이 바깥을 향하게 두었었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피곤해서 방향을 잘못 놓았나?’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는 그렇게 대충 물건을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아끼는 책은 더더욱. 찜찜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고, 서윤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어둠 속, 모든 것이 잠든 듯 고요했다. 도시의 희미한 불빛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눈을 감자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어디선가 작은 소리라도 들릴까 봐 불안했다.
똑. 똑. 똑.
이번에는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인가? 하지만 서윤은 자기 전에 수돗꼭지를 완벽하게 잠그는 습관이 있었다. 소리는 리듬을 타는 듯했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볍게 식탁을 두드리는 것처럼.
‘환청이야. 분명 환청일 거야.’
그녀는 베개로 귀를 막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소리는 베개를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더 이상 똑똑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부엌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그릇이 스치는 소리,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식기를 정리하는 것 같았다.
“거기… 누구 있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스탠드 조명을 켰다. 주황색 빛이 방을 가득 채웠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다. 복도를 지나 부엌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납처럼 무거웠다.
부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식기들도 가지런히 건조대에 놓여 있었고, 컵들도 상부장 안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조그만 양념병 세트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유리병은 깨지지 않았지만, 후추와 소금이 부엌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서윤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가… 누가 들어왔지?’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깨진 양념병과 흩뿌려진 조미료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였다.
딸깍, 딸깍.
이번에는 거실 벽에 걸려있던 시계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평소에는 신경 쓰이지도 않던 초침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크게 울렸다. 시계는 정확히 새벽 3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계가 갑자기 멈췄다. 초침이 정지한 시계는 섬뜩할 정도로 고요했다. 서윤은 공포에 질려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멈춘 시계에서 다시 부엌 바닥의 양념병으로 향했다. 그때, 깨진 유리 파편 사이로 무언가 움직였다.
조미료 가루가 서서히,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바닥 위를 긋는 것처럼.
그리고 흩뿌려진 후추 가루 위로 희미한 글자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가.’**
서윤의 입에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는 기괴한 형상으로 변해가는 후추 글씨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검은 가루는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렸다.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숨결이 느껴졌다.
‘나’라는 글자를 완성한 후추 가루가 순식간에 흩뿌려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부엌의 불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암흑 속에서, 그녀의 등 뒤로 무언가 거친 것이 스쳐 지나가는 감각.
서늘한 공기와 함께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내 집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