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준은 낡은 안경을 벗어 거친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자정이었다. 한강 변을 따라 늘어선 고층 아파트들의 불빛 중 하나, 그의 1004호 거실만이 텅 빈 어둠 속에서 홀로 침묵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시달린 머릿속은 온통 복잡한 숫자로 가득했지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이 그를 감쌌다. 보일러를 켜지 않았나?
그는 무심코 탁자 위에 놓인 커피잔을 보았다. 분명 출근 전 마시고 그대로 두었던 잔이었다. 그런데 잔의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아주 조금, 몇 센티미터 정도 움직인 것 같았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민준은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 텅 비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민준은 침대 옆 협탁 위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없었다. 어제 분명 자기 전까지 만지다 머리맡에 두었는데. 침대 밑, 베개 밑, 이불 속…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온 방을 뒤진 끝에, 핸드폰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 주방 식탁 위에서 발견되었다. 어젯밤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온 뒤 주방에 간 기억은 없었다. 순간 등골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지만, 이내 ‘멍청한 내가 또 깜빡했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그 후로 기이한 일들은 더욱 잦아졌다.
현관문 잠금장치는 가끔씩 혼자 ‘철컥’ 소리를 내며 잠기거나 풀렸다. 밤에는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유리 장식장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곤 했다. 달려나가 보면 아무것도 쓰러져 있지 않았다. TV는 리모컨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채널이 제멋대로 바뀌는가 하면, 한밤중에 볼륨이 최대치로 올라가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을 내기도 했다.
“진짜 미쳐버릴 것 같아, 세영아. 어제는 거실 불이 깜빡깜빡하다가 아예 나가버렸다니까. 한밤중에 혼자 앉아 있는데, 벽에서 누가 손톱으로 긁는 소리가 들렸어.”
퇴근 후 세영과의 통화에서 민준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세영은 그의 오랜 여자친구이자, 언제나 합리적인 해답을 찾는 사람이었다.
“민준 씨, 혹시 집 오래됐어? 아니면 전선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폴터가이스트? 그런 비과학적인 소리는 집어치우고. 당신 요즘 야근 많아서 피곤하잖아. 스트레스받으면 헛것이 보이기도 해.”
세영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민준은 스스로도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는 전기공을 불렀고, 도어록을 교체했으며, 심지어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을 점검받았다. 그러나 모든 기기는 완벽했고, 전선도 문제가 없었다.
그날 밤, 민준은 늦은 시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언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때, 뒤편의 책장에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민준은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돌아보니 꽂혀있던 책들 중 딱 한 권, 낡은 시집이 반쯤 튀어나와 있었다. 떨어진 책은 표지에 알 수 없는 얼룩이 진 오래된 동화책이었다.
‘이번엔 진짜… 내 착각이 아니야.’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세영에게 전화를 걸까 했지만, 그녀의 싸늘한 반응이 예상되어 그만두었다. 대신, 그는 그 동화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의 얼룩은 옅은 붉은색이었다. 낡은 종이 냄새와 함께 섬뜩한 기운이 풍겨 나오는 듯했다.
책을 든 순간, 집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깜빡였다. ‘탁, 탁, 탁.’ 거실의 샹들리에부터 침실의 스탠드, 주방의 형광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다가 완전히 꺼졌다. 순식간에 집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민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겨우 숨을 고르고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거실 중앙에 서 있는 자신을 비추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의 눈은 거실 한구석에 고정되었다. 그곳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한 착시가 느껴졌다.
“누구… 야?”
목소리가 떨렸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민준이 한 발자국 다가서자, 그림자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민준의 손에 들려 있던 동화책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펄럭이더니, 그의 손에서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책이 펼쳐진 페이지에는 섬뜩한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어두운 숲 속에서 한 소녀가 울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림 속 소녀의 눈동자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민준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의 이성적인 판단은 이미 바스러진 지 오래였다. 그 순간, 바닥에 떨어진 동화책 옆으로, 희미한 은빛이 반짝이며 작은 물체가 스르륵 굴러 나왔다. 그것은 낡은 은반지였다. 세월의 흔적으로 군데군데 녹슬어 있었지만, 기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민준은 홀린 듯 그 반지를 집어 들었다. 차가웠다. 반지를 손에 쥐자, 얼어붙었던 온몸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반지의 밴드 부분을 무심코 비틀자, 아주 희미하고 몽환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오래된 자장가 같았다.
멜로디가 흐르기 시작하자, 아파트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바닥에서부터 벽, 천장까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뒤흔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진동 속에서, 민준의 눈앞에 서서히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실 중앙에, 투명한 푸른빛을 띤 형체가 떠올랐다. 흐릿했지만, 분명 백발의 노인 여성의 형상이었다. 여인은 슬픈 눈으로 민준을 응시했다. 그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은반지가 굴러 나왔던 책장 아래 바닥을 가리켰다. 여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깊은 슬픔과 함께 간절한 눈빛만이 그를 꿰뚫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민준은 혼란스러웠지만, 그 형상에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간절함. 애원. 그것만이 느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플래시를 비춰 여인이 가리킨 바닥을 살폈다. 책장 아래, 모서리 부분의 마루 틈새가 아주 미세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는 손톱으로 그 틈을 벌렸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함께, 손끝에 닿는 얇은 종잇조각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꺼내보니, 낡은 편지지였다. 세월에 바래고 구겨져 있었지만, 또렷하게 쓰인 글씨가 보였다.
‘송혜인. 주민등록번호 XXXX-XXXXXX.’
편지지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나 송혜인은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습니다. 죽는다면 그것은 타살입니다. 내 재산을 노리는 김영호에게 모든 걸 빼앗겼습니다. 그는 나를 협박했고, 서류에 강제로 서명하게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부디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날짜는 20년 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민준은 손에 든 은반지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투명한 여인의 형상을.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1004호에서 억울하게 죽은 송혜인 씨의 영혼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홀로 갇혀 자신의 죽음의 진실을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민준이, 그 호소를 들어준 첫 번째 사람이 된 것이었다.
그 순간, 여인의 형상이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스라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집안의 모든 불빛이 다시 환하게 켜졌다. 거실은 어수선했고, 깨진 액자의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지만, 더 이상 차가운 기운이나 섬뜩한 움직임은 없었다.
침묵. 깊고 고요한 침묵이 아파트를 채웠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이전의 싸늘했던 침묵이 아니었다. 비로소 찾아온 평화로움이었다.
민준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손에 든 송혜인 씨의 유서와 은반지를 번갈아 보며, 알 수 없는 의무감과 함께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증명하든 상관없었다. 그는 그 진실을, 20년 전 잊혔던 억울함을 세상에 알려야 했다.
경찰은 그의 이야기를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들었다. 특히 폴터가이스트 이야기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가 내민 낡은 유서와, 함께 발견된 20년 전 송혜인 씨의 사망 기록, 그리고 당시 재산을 상속받았던 김영호라는 인물의 존재는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재수사를 통해 숨겨진 진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민준은 결국 1004호를 떠났다. 더 이상 그곳에 살 수 없었다. 평범했던 그의 삶은 송혜인 씨의 간절한 외침과 함께 완전히 뒤바뀌었다. 고요해진 아파트의 빈방에는 더 이상 유령의 존재는 없었지만, 20년의 세월이 응축된 침묵만이 남아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알고 있었다. 이 도시의 수많은 아파트 중 한곳에서, 또 다른 잊힌 진실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그의 1004호는, 더 이상 단순히 거주하는 공간이 아닌, 하나의 묘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