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핏빛으로 물들기 직전의 깊은 보라색이었다. 대기가 잔뜩 오염되어 태양도 달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도시에서,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하던 것은 거대한 건물들의 틈새로 부는 메마른 바람뿐이었다. 강태인은 그 바람을 느끼는 대신, 조종석 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그의 거대 로봇, ‘그림자 칼날’의 외장은 주변 건물들의 잔해와 뒤섞여 완벽한 위장을 이루고 있었다.
“……한서준.”
나지막이 읊조린 이름은, 조종석의 차가운 금속 벽에 부딪혀 공허하게 울렸다.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믿음으로 가득했던 미소, 그리고 그 뒤에 감춰졌던 비릿한 야망. 그 날의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던 내 모든 것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타겟은 ‘불멸자들의 요새’. 한서준이 현재 지휘하고 있는 제3군단의 심장부. 감히 그 누구도 침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하지만 강태인에게는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오직 복수만이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유일한 엔진이었다.
*삑— 삑—*
센서가 경고음을 울렸다. 요새의 외곽 경비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태인은 무거운 심호흡을 했다. 숨죽인 사냥개가 먹잇감을 발견한 순간처럼, 그의 눈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제군들, 잘 쉬었는가.”
강태인의 목소리가 시스템에 연결된 채널을 통해 흘러나왔다. 물론, 그가 제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그림자 칼날, 그리고 그의 분노 뿐이었다.
*휘이이잉—*
그림자 칼날의 어깨에 숨겨져 있던 ‘야차포’가 조용히 전개됐다. 푸른색 에너지 충전음이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조준경에 첫 번째 경비 로봇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허점 없는 순찰 경로. 완벽한 줄 알았겠지만, 그는 그 완벽함을 만든 자들과 함께 훈련받았던 사내였다.
*콰아앙!*
첫 발이 발사됐다. 압축된 플라즈마 에너지가 섬광처럼 뻗어 나가 경비 로봇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했다. 금속 파편과 스파크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로봇은 맥없이 고철 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적 침입! 비상! 비상!”
사방에서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강태인은 망설임 없이 그림자 칼날을 움직였다. 두터운 다리 관절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지면을 박찼다. 그림자 칼날은 순식간에 요새의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거대한 닌자처럼, 무거운 육체를 놀라운 속도와 은밀함으로 움직였다.
*지이잉! 지이잉!*
요새의 방어 시스템이 활성화되며 거대한 에너지 실드가 펼쳐졌다. 강태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이 정도 가지고 막으려 들 줄이야.”
그림자 칼날의 왼팔에서 숨겨진 ‘파쇄 드릴’이 튀어나왔다. 고속 회전하는 드릴 끝에 푸른 에너지가 모였다. 강태인은 방어막의 가장 취약한 지점, 과거 자신이 직접 설계에 참여했던 곳을 향해 돌진했다.
*쉬이이익— 콰드드득!*
드릴이 에너지 실드에 닿자마자, 격렬한 마찰음과 함께 섬광이 터져 나왔다. 실드는 억지로 파괴되는 대신, 마치 늪에 빠지듯 강태인의 드릴을 흡수했다. 하지만 강태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뚫어라! 파괴해라! 내 갈 길을 막는 모든 것을!”
그의 외침과 함께 드릴의 회전 속도가 극한으로 치솟았다. 마침내, 실드의 한계점을 넘어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으으으윽! 쩌저저적!*
푸른색 실드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거대한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 나며 요새 안으로 진입하는 통로를 열었다. 강태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림자 칼날을 몰아넣었다.
요새 내부는 거대한 돔 형태의 공간이었다. 수십 대의 경비 로봇과 전투 메카들이 이미 강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무장이 일제히 강태인을 향해 조준됐다. 붉은색 레이저 포인터가 그림자 칼날의 외장을 스캔했다.
“강태인! 네놈이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일 줄이야!”
거친 전자음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거대한 홀 한가운데, 다른 메카들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검은색 로봇이 서 있었다. 등에는 거대한 망토처럼 생긴 에너지 패널이 휘날리고 있었고, 어깨에는 위협적인 형태의 대구경 캐논이 장착되어 있었다.
‘칠흑의 왕좌.’ 한서준의 전용기였다.
“서준… 아니, 한서준. 오랜만이군.”
강태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담겨 있었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를 자격은 없어. 배신자 주제에.”
한서준의 목소리에서는 조롱과 경멸이 뚝뚝 떨어졌다. 과거의 친밀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냉혹한 지배자의 목소리였다.
“배신자? 그건 내가 아니라 너지, 한서준.” 강태인은 그림자 칼날의 에너지 블레이드를 전개했다. 푸른빛이 번뜩이며 날카로운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모든 것을 빼앗고,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던 네놈이 할 소리는 아니지!”
“어리석긴. 약자는 도태되는 법. 너는 그저 나에게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다. 폐기 처분될 도구.”
칠흑의 왕좌의 양 팔에서 거대한 에너지 캐논이 솟아올랐다. 강력한 에너지가 충전되는 소리가 홀 전체를 뒤흔들었다.
“네놈의 분노 따위, 이 ‘불멸자들의 요새’에서 영원히 묻어주마. 그리고 네 그 볼품없는 그림자 칼날도 고철로 만들어주지.”
강태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분노가 피를 끓게 하고, 과거의 상처가 그의 조종간을 쥐는 손에 힘을 실었다.
“웃기지 마라, 한서준! 너는 나를 너무 얕봤어! 내가 어떤 지옥을 거쳐 다시 일어섰는지, 네놈은 상상조차 못 할 거다!”
그림자 칼날은 칠흑의 왕좌를 향해 돌진했다. 홀에 있던 다른 로봇들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지만, 강태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폭풍을 뚫고 나아가는 한 줄기 빛처럼, 그림자 칼날은 오직 한서준만을 노렸다.
*콰과광! 콰과광!*
칠흑의 왕좌의 캐논에서 강력한 플라즈마포가 발사됐다. 홀의 바닥과 벽이 뻥뻥 뚫리며 엄청난 폭발음을 냈다. 강태인은 필사적으로 회피 기동을 펼쳤다. 과거 서준과 함께 훈련하며 익혔던 모든 기술, 그와 함께 만들었던 모든 전술을 총동원했다.
‘네 공격 패턴은 내가 훤히 꿰고 있다!’
강태인은 플라즈마포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칠흑의 왕좌의 측면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전개했던 에너지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쉬이이익—*
날카로운 칼날이 칠흑의 왕좌의 거대한 어깨 장갑에 부딪혔다.
*카앙!*
귀를 찢는 듯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칠흑의 왕좌의 방어막이 번쩍였다. 충격파가 조종석을 강타했고, 강태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공격은 막혔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이 정도로는 날 쓰러뜨릴 수 없다, 강태인.”
칠흑의 왕좌는 거대한 팔을 휘둘러 그림자 칼날을 후려쳤다. 강철 주먹이 그림자 칼날의 몸체를 강타했고, 강태인은 조종석 안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 경고등이 번쩍이며 로봇의 내구도 하락을 알렸다.
“크윽…!”
하지만 강태인은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지. 하지만… 나는 네 약점을 알고 있다, 한서준!”
그림자 칼날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 파편처럼 칠흑의 왕좌의 다리 쪽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것은 바로 그림자 칼날의 숨겨진 무기, ‘환영 검’이었다. 특수한 에너지 케이블로 연결된 소형 블레이드 암은 서준도 알지 못했던, 강태인만의 기술이었다.
*쐐애애액!*
환영 검은 칠흑의 왕좌의 거대한 다리 관절, 가장 복잡하고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노렸다. 한서준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냉철하게 방어막을 전개했다.
“헛수고다!”
하지만 강태인은 이미 한 단계 더 나아가 있었다.
“기억하나, 서준! 우리 ‘환영 부대’의 마지막 훈련!”
그의 말과 함께, 그림자 칼날의 어깨에 숨겨진 또 다른 ‘야차포’가 전개됐다. 이번에는 일반 플라즈마가 아니었다. 특수 제작된 ‘EMP 탄’이었다.
*치이이이잉—*
EMP 탄이 발사됐다. 환영 검에 집중된 방어막의 틈새를 뚫고 칠흑의 왕좌의 다리 관절부에 정확히 명중했다.
*콰아앙! 지지직—!*
순간, 칠흑의 왕좌의 모든 시스템이 격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삐걱거렸다. 다리 관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한쪽 다리가 순간적으로 마비된 듯 주저앉았다.
“이런…! 감히…!”
한서준의 목소리에 당황과 함께 분노가 서렸다. 그의 차가운 표정에도 균열이 가는 순간이었다. 강태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림자 칼날은 전속력으로 주저앉은 칠흑의 왕좌를 향해 돌진했다. 에너지 블레이드가 다시 한번 푸른 섬광을 뿜어냈다.
“이제 끝이다, 한서준!”
그의 외침과 함께, 강태인은 칠흑의 왕좌의 조종석을 향해 칼날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칠흑의 왕좌의 어깨에 장착된 캐논에서 마지막 발악처럼 거대한 에너지 폭풍이 터져 나왔다. 그 폭풍은 강태인이 예상했던 공격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요새의 천장을 뚫고 나갈 만큼의 위력이었다.
*쿠와아아앙!!!*
폭풍이 강태인의 그림자 칼날을 집어삼켰다. 조종석의 모든 불이 꺼지며, 강태인의 시야는 암흑으로 변했다.
“크윽…! 이… 이건…!”
칠흑의 왕좌의 시스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한서준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간신히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의 입가에 다시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강태인… 네놈이 아는 건 절반도 안 돼.”
연기가 자욱한 홀, 강태인의 그림자 칼날은 폭풍의 잔해 속에서 겨우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종석 안의 강태인은 피를 토하며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마지막 말을 읊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나 그의 눈앞에, 요새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칠흑의 왕좌보다도 훨씬 크고, 훨씬 더 위압적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마치 심해에서 깨어난 고대 괴수처럼, 수많은 포탑과 에너지 코어를 드러내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서준은 그 거대한 존재를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이다, 친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