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어둠을 머금고 헐떡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단지 바람 소리만은 아니었다. 섬뜩한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갈증에 허덕이는 인간의 끔찍한 절규 같기도 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끈질기게 밀려왔다.
강휘는 적막한 암자 마루 끝에 걸터앉아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심신수련 중이었으나, 그의 귀는 저 멀리 산 아래에서 울리는 불길한 소리에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처음엔 짐승들이 굶주려 미쳐 날뛰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기이해졌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기운이 산기슭을 타고 오르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는, 그저 짐승의 소리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곳은 은밀한 산중에 위치한 무명의 암자. 강호의 풍파에서 한 발짝 물러나 홀로 무학을 연마하던 강휘에게 세상의 변화는 멀고 아득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는 세상일에 초연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피의 비린내가 밤바람을 타고 그의 콧속을 파고들 때마다, 고요하던 내면은 격랑처럼 흔들렸다.
“강휘 도련님! 강휘 도련님!”
숨 가쁜 목소리가 암자의 고즈넉함을 단숨에 깨트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이는 그의 시동이자 유일한 동반자인 소년, 연호였다. 연호의 얼굴은 흙투성이에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봉인이 찍힌 두툼한 서찰이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냐, 연호야. 이리도 급히 달려올 일인가.”
강휘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연호의 손에 들린 서찰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림맹의 인장이 선명했다.
“저, 저 아래 마을에요… 괴인들이… 괴인들이 나타났어요! 사람들이 모두 미쳐서 서로를 물어뜯고,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서…”
연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강휘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괴인이라… 강호에 떠돌던 불길한 소문이 드디어 여기까지 미친 것인가.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산 아래를 응시했다. 밤의 장막에 가려져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붉은 기운과 함께 섬뜩한 그림자들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서찰은 뭐냐.”
강휘가 연호의 손에서 서찰을 빼앗아 들었다. 봉인을 뜯자, 서늘한 먹 향과 함께 긴급한 내용이 펼쳐졌다.
「강호의 모든 무림인들에게 고하노라.
지금 천하가 미증유의 위기에 처하였음을 알리는 바이다.
이름 없는 병(病)이 창궐하여 산 자는 죽은 자가 되고, 죽은 자는 다시 일어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탐하도다.
이를 괴인(怪人)이라 칭하며, 이들은 이미 강호의 모든 경계를 허물고 무림의 존립마저 위협하고 있다.
이에 무림맹은 각 문파의 장문인들과 원로들의 뜻을 모아,
내일 정오, 숭산(崇山) 무림맹 총단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한다.
강휘 소협은 만사를 제쳐두고 즉시 총단으로 집결하여 위기에 맞설 방도를 논하라.
늦는 자는 천하의 죄인이 될 것이요, 무림의 명맥이 끊어지는 업보를 받으리라.」
서찰의 내용은 강휘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천하의 죄인’, ‘무림의 명맥’. 이토록 엄중한 경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세상의 혼란이 아니라, 무림 전체를 위협하는 재앙이라는 뜻이었다.
“도련님, 어떻게 해요… 세상이 끝나는 건가요?”
연호가 울먹였다.
강휘는 서찰을 접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연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세상이 끝나지는 않을 게다. 아직 무림이 건재하니.”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확신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암자를 벗어났다. 멀리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핏빛 연기를 등지고, 그의 눈빛은 흔들렸다.
***
숭산 무림맹 총단.
장엄한 위용을 자랑하던 거대한 회의당은 오늘따라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강휘는 여느 젊은 무인들처럼 회의당 한 켠에 자리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강호의 내로라하는 문파의 장문인, 각 무가(武家)의 가주, 그리고 이름 없는 은거 고수들까지, 무림의 모든 역량이 집결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평소의 호기로운 기상 대신, 근심과 공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괴인… 그것들은 죽은 자가 아니오. 살아있는 시체이며, 우리의 모든 것을 탐하는 존재들이오.”
백발이 성성한 태산파의 장문인, 진원대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생 쌓아온 무위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이미 중원 팔 할이 놈들에게 잠식당했습니다. 강호의 벽은 그저 허상일 뿐. 놈들은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무력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강휘는 회의당에 모인 무림인들의 면면을 살폈다. 살기 등등한 눈빛의 전대 고수들, 잔뜩 긴장한 채 침묵하는 젊은 무사들. 그들의 눈빛에는 공통적으로 ‘어떻게’라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압도적인 재앙 앞에서 무림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길고 긴 침묵 끝에, 연단 중앙에 좌정해 있던 무림맹주, 천우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으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우리는 이미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았습니다. 각 문파의 진법을 펼치고, 결계술을 동원하여 놈들을 막아 보려 했으나… 놈들은 끝없이 밀려옵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들. 그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지경이고, 우리의 내공으로는 놈들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림마저 이 재앙에 삼켜질 것입니다.”
장내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림맹주조차 이토록 절망적인 어조로 말할 정도라니.
“하여, 무림맹은 모든 문파의 원로들과 고심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천우진 맹주의 목소리가 회의당에 울려 퍼졌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우리는 지금, 무림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각 문파의 이해득실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이 천하를 구원할 단 한 명의 영웅, 단 하나의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모든 무림의 힘을 결집하고, 그 힘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절대적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장내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지도자라니. 무림맹주가 직접 나서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천우진 맹주는 고개를 저었다.
“이 맹주가 가진 힘으로는 이 거대한 재앙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태는 그 어떤 문파의 무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위기입니다. 고로, 우리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맹주의 눈빛이 단호하게 빛났다.
“지금부터 ‘천하구원 무술 대회’를 개최한다!”
회의당이 일순간 술렁거렸다. 무술 대회?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무술 대회라니?
“맹주님!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놈들이 들이닥치는데 겨우 무술 대회라니요!”
한 젊은 무사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시끄럽다!” 천우진 맹주의 호통이 장내를 잠재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권위가 서려 있었다.
“이 대회는 단순한 기량 겨루기가 아니다. 이 대회는 이 천하의 운명을 걸고, 무림의 모든 것을 바쳐 진행되는 것이다. 우승자는 이 무림의 모든 권한과 모든 병력을 휘두를 절대적인 지도자가 될 것이며, 이 무림의 모든 지혜를 집대성하여 괴인들을 물리칠 방도를 찾아낼 것이다!”
천우진 맹주는 회의당을 가득 메운 무인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강휘에게도 잠시 머물렀다.
“우승자는 모든 무림의 존경과 복종을 받을 것이며, 이 재앙을 끝낼 유일한 희망이 될 것이다. 실패는 곧 무림의 소멸이며, 천하의 멸망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림이 선택한 마지막 길이다.”
강휘는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기대감,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책임감. 천하의 운명을 건 무술 대회라니. 평생을 홀로 무학을 갈고닦아 왔던 그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피를 끓게 하는 알 수 없는 숙명의 부름이었다.
회의당의 고요는 이제 무거운 침묵으로 변해 있었다. 저마다의 무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맹주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고, 누군가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의 경쟁자들을 스캔했다.
천우진 맹주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장로가 거대한 북을 향해 다가섰다.
“대회는 지금부터 일주일 뒤, 이곳 숭산 무림맹 총단에서 시작될 것이다. 각자 지닌 모든 무위를 쏟아내어 천하를 구원할 단 한 명의 영웅이 되어라!”
두 장로의 손에 들린 북채가 공중에서 섬광처럼 번뜩였다.
**콰아앙! 콰앙! 콰앙!**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무림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을 고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의 마지막 발악일지도 모를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강휘는 눈을 감았다. 그의 귓가에는 북소리와 함께 멀리서 들려오던 괴인들의 울음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지옥의 문이 열리고, 그 문 앞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칼을 뽑아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