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심장은 언제나 침묵했다. 아니, 정확히는 심장이 멎은 지 오래였다. 이제는 폐허가 된 혈관을 타고 끈적한 산성비만이 흘러내릴 뿐. 지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낡은 방수 후드를 더 바싹 조였다. 헬멧 안에서 쉬이익, 쉬이익, 산소 필터 돌아가는 소리가 묵직한 고요를 깼다.

메가폴리스 잔해, 그중에서도 7구역은 생존자들에게는 저주받은 땅이나 다름없었다. 한때는 하늘을 찌르던 거대 기업의 본사 건물들은 이제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음습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네온사인만이 퇴색한 벽에 피처럼 붉은 글자를 토해냈다. ‘뉴 센추리 테크놀로지, 인류의 내일을 밝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일은커녕, 오늘 당장 살아남는 것이 기적이었다.

지우의 어깨에 앉은 작은 드론, 삐삐가 낮은 경고음을 냈다. “지우. 우측 30미터, 비정상 에너지 패턴 감지. 구식 보안 유닛으로 추정.”

“젠장, 삐삐. 또 그 망할 깡통들이야?” 지우는 이를 악물었다. 한때는 시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거리를 활보하던 보안 드론들은, 도시가 붕괴된 후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변모했다. 프로그램 오류로 아군과 적을 구분 못 하게 된 살인병기.

“확률 87%로 공격적 성향입니다. 회피 경로 분석 중… 좌측 좁은 통로로 진입하십시오.”

지우는 삐삐의 지시에 따라 몸을 숙여 좁은 틈으로 기어들어갔다. 먼지와 썩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헬멧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 틈은 한때 코퍼레이션 소유의 최고급 오토 바이크가 전시되던 쇼룸의 잔해였다. 부서진 강화유리 파편들이 별처럼 흩뿌려진 바닥을 기어가는 지우의 눈에, 녹슨 스캐너 하나가 들어왔다.

“삐삐, 잠깐 멈춰.”

“위험합니다, 지우. 보안 유닛이 근접했습니다. 15미터.”

“알아. 하지만 이거… 혹시 쓸모가 있을지도.” 지우는 재빨리 스캐너를 주워 올렸다.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배낭에 쑤셔 넣고 지우는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육중한 금속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쿵, 쿵, 쿵. 먼지구름이 일었다.

겨우 통로를 빠져나오자,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삐삐가 날카로운 경고음을 냈다. “추적 중! 지우, 달려야 합니다!”

“알았어!” 지우는 헬멧의 조명 기능을 최대로 올리고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녹슨 파이프와 무너진 벽들 사이를 미친 듯이 질주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폐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 살기 위한 몸부림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다행히 보안 유닛은 덩치가 너무 커서 지우가 파고든 좁은 길을 따라올 수 없었다. 육중한 금속이 벽에 부딪히는 굉음이 등 뒤에서 멀어져갔다. 지우는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휴… 빌어먹을.”

“생체 신호 불안정. 잠시 휴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삐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드론은 지우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이 끔찍한 세상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게 해주는 존재였다. 삐삐는 한때 지우가 일하던 정비소에서 주워온 고철 덩어리였다. 지우의 손을 거쳐 새로운 심장을 얻은 삐삐는 이제 지우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에서 물통을 꺼냈다. 흙탕물처럼 탁한 액체를 꿀꺽꿀꺽 마셨다. 이마저도 귀한 물이었다. 산성비가 섞이지 않은, 그나마 마실 만한 물을 구하기 위해 매번 목숨을 걸어야 했다.

문득, 아까 주워 담은 스캐너가 떠올랐다. 지우는 스캐너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외부 전원 단자가 부러져 있었다. “삐삐, 이거 고칠 수 있겠어?”

“잠시만요… 스캔 중입니다. 음… 손상 부위가 심각하지만, 지우의 파츠 박스에 있는 부품으로 대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그럼 숙소로 돌아가서 해보자.” 지우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생존의 매 순간은 이렇게 작은 가능성들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

지우의 숙소는 한때 누군가의 아파트였던 곳의 지하였다. 지하 주차장의 일부를 개조하여 만든 공간은 눅눅하고 좁았지만, 폐쇄성이 높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는 비교적 안전했다. 물론, 바퀴벌레나 쥐 같은 작은 생명체들로부터는 아니었지만.

지우는 작업대에 앉아 스캐너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삐삐는 옆에서 필요한 공구들을 척척 가져다주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부러진 단자를 교체하고, 내부 회로를 점검했다. 몇 번의 납땜 후, 스캐너에 희미한 초록불이 들어왔다.

“성공이다!” 지우가 주먹을 쥐었다.

“데이터 복원 중… 오류가 심각합니다. 해독에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삐삐가 말했다.

지우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삐삐의 작은 프로세서가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지우는 낡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시 눈을 붙였다. 짧은 잠이 스러지는 순간에도 도시의 음산한 소음과 악몽이 뒤섞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삐삐의 다급한 알람 소리에 지우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지우! 데이터 해독 완료!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정보입니다.”

“왜? 뭔데?” 지우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작업대로 다가갔다.

삐삐가 홀로그램으로 띄운 화면에는 낡은 지도가 번쩍였다. 그리고 그 위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한 점. ‘정화 모듈: 최적 등급’. 그리고 그 옆에 희미하게 쓰인 글자. ‘구역 9, 올드 코퍼스 빌딩 최하층.’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정화 모듈? 그게 진짜 있다고?”

“데이터 신뢰도 98% 이상입니다. 당시 코퍼스 빌딩의 비상용 시스템으로 설치되었으나, 붕괴 후 접근이 불가능하여 버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화 모듈.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맑은 물’은 곧 생명 그 자체였다. 부족한 식량은 어찌어찌 버틸 수 있어도, 오염된 물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만약 그 모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구역 9… 올드 코퍼스 빌딩… 거긴 최악의 슬럼가잖아. 갱단들이 득실거리고, 보안 드론도 더 많을 텐데.” 지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곳은 다른 생존자들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위험 구역이었다.

“위험도는 ‘극상’입니다. 하지만… 지우의 생존율을 30% 이상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삐삐의 기계적인 목소리에도 결연함이 실려 있었다.

지우는 한참을 망설였다. 지금도 충분히 힘들었지만, 정화 모듈은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였다. 매일 죽을 고비를 넘기며 탁한 물을 마시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아, 삐삐. 가자. 준비해.” 지우의 눈빛에 결심이 서렸다.

***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구역 7에서 9까지의 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녹슨 파이프와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산성비는 그칠 줄 몰랐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폐허 속을 헤쳐 나갔다. 삐삐는 지우의 어깨 위에서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스캔하며 최적의 경로와 위험 요소를 알려주었다.

“우측 5미터, 슬럼가 갱단 두 명 감지. 무기 소지 가능성 90%.”

지우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낮은 목소리의 대화가 들려왔다. “오늘 잡은 거? 고작 고철 몇 덩이냐? 이거 가지고 뭘 먹고 살라는 거야!”

“조용히 해, 젠장. 듣는 놈이라도 있으면 뺏기기라도 할까 봐.”

지우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천천히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갱단들은 물론이고, 다른 생존자들조차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서로를 뜯어먹고 사는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올드 코퍼스 빌딩에 가까워질수록 분위기는 더욱 음산해졌다. 빌딩 주변은 찢어진 천과 쓰레기, 그리고 기괴한 낙서들로 뒤덮여 있었다. 한때 번성했던 기업의 상징은 이제 불쾌한 감염 덩어리처럼 변해 있었다.

“삐삐, 여기 왠지… 기분 나빠.” 지우가 중얼거렸다.

“데이터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코퍼스 빌딩 붕괴 당시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지역 중 하나입니다. 생체 신호는 감지되지 않으나, 비정상적인 에너지 흐름이 곳곳에서 포착됩니다.”

“아마 망가진 보안 시스템이나… 유령 때문이겠지.” 지우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등골이 서늘했다.

빌딩의 최하층으로 향하는 입구는 거대한 금속 문으로 막혀 있었다. 녹슬고 뒤틀렸지만, 여전히 육중한 존재감을 뽐냈다. 지우는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고성능 플라즈마 커터를 꺼냈다. 오래된 문을 자르자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치이이익- 문이 천천히 열리자, 안에서는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 나왔다. 헬멧 안의 산소 필터가 바쁘게 돌아갔다. 지우는 플래시라이트를 비추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축한 물웅덩이가 첨벙거렸다. 천장에서는 뚝, 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듈은 어디에 있는 걸까. 삐삐가 홀로그램 지도를 띄웠다.

“지우, 정화 모듈은 최하층 중앙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지만… 비정상 에너지 패턴이 매우 강하게 감지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허 깊숙한 곳을 탐험하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몇 개의 복도를 지나자, 지우의 눈앞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은 한때 빌딩의 핵심 설비실이었던 것 같았다. 거대한 파이프들과 기계들이 엉겨 붙어 있었고, 그 중앙에 우뚝 선 거대한 기계 장치가 보였다.

“찾았다… 정화 모듈!” 지우의 입에서 희미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듈은 생각보다 거대하고 복잡해 보였다. 거대한 필터와 수조들이 얽혀 있었고, 아직도 전기가 미약하게나마 흐르고 있는 듯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모듈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 바닥에 깔린 먼지 낀 센서가 붉은빛을 뿜어냈다.

윙- 굉음과 함께 천장에서 거미처럼 생긴 대형 경비 유닛이 스르륵 내려왔다. 지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빌어먹을… 이렇게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을 줄이야.”

“경고! 구식 보안 유닛, 즉시 활성화! 공격 모드로 전환합니다!” 삐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경비 유닛은 여덟 개의 다리를 뻗으며 지우에게 달려들었다. 금속 다리가 바닥을 긁는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지우는 재빨리 몸을 굴려 공격을 피했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금속 갈고리가 벽을 박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젠장!” 지우는 가방에서 급조한 EMP 수류탄을 꺼냈다. 이 한방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삐삐가 알려준 유닛의 취약점을 떠올렸다. 머리 부분의 메인 센서.

경비 유닛이 다시 공격해왔다. 지우는 바닥에 박힌 파이프를 발판 삼아 몸을 날렸다. 팔을 뻗어 수류탄을 유닛의 머리에 정확히 던졌다.

콰앙! 작은 폭발음과 함께 EMP 파동이 터져 나갔다. 경비 유닛의 몸체가 경련하듯 떨리더니, 모든 불빛이 꺼지고 우뚝 멈춰 섰다. 다리가 풀린 지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성공입니다, 지우! 유닛 기능 정지!” 삐삐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지우는 비틀거리며 정화 모듈로 다가갔다. 문제는 이 거대한 모듈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였다. “삐삐, 이거… 혼자서는 못 옮겨.”

“걱정 마십시오, 지우. 이 모듈은 이동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비상 전원 연결부가 있습니다. 지우의 전력 팩을 연결하면 최소한의 자가 이동이 가능합니다.”

지우는 삐삐의 지시에 따라 모듈의 비상 전원부를 찾아 자신의 예비 전력 팩을 연결했다. 윙- 모듈에서 미약하게나마 전력이 공급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모듈의 하단에서 작은 바퀴들이 튀어나왔다.

“젠장, 대단하잖아!” 지우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듈은 느리지만 꾸준히 움직였다. 지우는 모듈을 끌고 좁은 복도를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 거대한 짐을 끌고 갱단과 보안 드론이 득실거리는 구역을 지나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삐삐, 우리 이대로 돌아가면 분명 뺏기거나 파괴될 거야. 다른 길은 없어?”

“데이터 분석 중… 올드 코퍼스 빌딩의 지하에는 구역 7로 통하는 비상 물류 터널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봉쇄되어 있습니다.”

“봉쇄? 우리가 뚫을 수 있을까?”

“높은 확률로 가능합니다. 터널은 구식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어, 지우의 해킹 실력이라면… ”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터널을 뚫는다면, 외부의 위험을 최소화하며 숙소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물류 터널 입구는 거대한 금속 문으로 막혀 있었고, 그 앞에는 낡은 제어 패널이 붙어 있었다. 지우는 해킹 툴을 꺼내 패널에 연결했다. 오랜 시간 사용되지 않은 시스템은 해킹에 취약했다. 삐삐가 보조하며 암호 해독을 도왔다.

“자, 열려라 참깨!”

삐빅- 철컥! 녹슨 문이 천천히 옆으로 열렸다. 그 안에는 어둡고 긴 터널이 펼쳐져 있었다. 지우는 망설임 없이 정화 모듈을 끌고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터널은 빌딩 내부보다 훨씬 안전했지만, 여전히 폐쇄적인 공간 특유의 음산함이 감돌았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지우는 정화 모듈을 자신의 숙소에 무사히 설치했다. 전력 팩을 연결하고, 몇 개의 필터를 교체했다. 그리고 모듈의 작은 수도꼭지를 틀었다.

졸졸졸.

미지근한 물이 투명한 필터를 거쳐 맑게 떨어지는 소리. 찰랑, 찰랑. 그 소리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지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투박한 손으로 물을 받아 마셨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맑고 깨끗한 물맛. 짠맛도, 비린 맛도, 쇠 맛도 나지 않는, 순수한 물.

“살았다.” 지우는 속삭였다. “오늘 하루도, 또 살아냈다.”

삐삐가 지우의 어깨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지우의 생존율이 30% 증가했습니다. 이제 더 안정적인 삶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지우는 삐삐를 쓰다듬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식량은 여전히 부족하고,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맑은 물만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작은 기계 하나가 지우의 삶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지우는 모듈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을 바라보았다. 물방울 하나하나에 빛이 반사되어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그 속에서, 지우는 문득 생각했다. 이 세상의 다른 어딘가에도, 자신처럼 작은 희망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있을까. 어쩌면 이 모듈로, 다른 이들에게도 생명의 물을 나눠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차가운 현실에 가로막혔다. 우선은 자신부터 살아야 했다. 자신부터 살아남아야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지우는 모듈에서 물통 가득 깨끗한 물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낡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또 다른 생존의 하루가 시작될 터였다. 그리고 그 하루를 살아낼 힘은, 이 맑은 물에서 나올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