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캡슐에 몸을 뉘었다.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를 감싸고, 이내 현실의 감각은 희미한 잔향처럼 사라졌다. 시야는 순식간에 차가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거대한 도시의 풍경으로 변모했다. 거대한 첨탑들이 하늘을 찌르고,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 사이로 마차가 지나다니는 곳. 이곳은 ‘미궁의 밤’이었다.
“로그인 완료. 플레이어 강태오, 환영합니다.”
귓가에 울리는 부드러운 시스템 보이스마저도 익숙한 풍경의 일부였다. 나는 늘 그랬듯 고딕 양식의 아치형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개인 연구실에 서 있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연구실 문이 격렬하게 두드려졌다.
“태오 님! 큰일 났습니다!”
거친 숨소리를 몰아쉬며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나와 종종 사건을 의뢰하고 해결했던 도시 경비대 소속의 NPC 수사관, ‘루크’였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 대신 공포와 혼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일인가, 루크? 자네 얼굴이 마치 밤의 악마라도 본 것 같군.”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악마보다 더합니다! 오스카 성의 에르윈 백작님이… 살해당하셨습니다!”
잔잔하던 연구실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에르윈 백작. 이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명이자, 광대한 무역망을 손에 쥐고 있던 인물. 게임 내에서도 그의 죽음은 분명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터였다.
“살해? 자세히 말해보게.”
“서재에서 발견되셨습니다. 흉기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태오 님. 더 놀라운 것은, 백작님이 발견된 서재가… 밀실이었습니다!”
루크의 목소리에는 경외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밀실. 그래, 바로 그거였다. 내가 이 게임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가장 잘하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것.
“오스카 성으로 안내해주게. 최대한 빨리.”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길게 늘어지는 회색 코트를 여미고 연구실을 나섰다.
오스카 성은 평소와 달리 살벌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푸른빛 경비병 갑옷을 입은 NPC들이 삼엄하게 주변을 지키고 있었고,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의 목소리가 성벽에 부딪혀 울렸다. 그들은 나와 루크를 보며 저마다 수군거렸다.
“저 사람, 강태오 아니야? 불가능한 사건만 맡는다는 그 탐정?”
“드디어 백작님 살인 사건을 풀러 온 건가? 밀실 살인이라던데…”
“이번엔 좀 특별할 걸. 에르윈 백작이라니,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야.”
나는 그들의 시선이나 말에 개의치 않고 묵묵히 걸었다. 루크가 길을 안내하며 조용히 상황을 설명했다.
“시신은 오늘 새벽, 집사 알프레드가 발견했습니다. 백작님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갔다가… 서재에서 발견했답니다. 시각은 대략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로 추정됩니다. 등 뒤에 단 한 번의 칼부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핵심은 언제나 ‘밀실’이었다.
“그 밀실이란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게.”
“두꺼운 참나무 문은 밖에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안쪽에는 빗장이 걸려 있었다는 것이 알프레드 집사의 증언입니다. 창문은 높고 좁았으며, 굳게 닫힌 채로 밖에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어떤 외부 침입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모든 경비병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요.”
우리는 마침내 백작의 서재 앞에 도착했다. 경비병 대장 ‘캡틴 그레고르’가 굳은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그는 육중한 체구에 수염을 길게 기른 노련한 군인이었다.
“강태오 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악몽 같은 상황을 부디 해결해 주십시오.”
“문을 열어주게, 그레고르 대장. 내가 직접 확인하지.”
문이 열리고, 서재 안에서 훅 끼쳐오는 차가운 공기와 핏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나는 익숙한 듯 차분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방은 꽤 넓고 화려했다. 벽면 가득 빼곡하게 책이 꽂힌 거대한 서가, 중앙에는 묵직한 참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 뒤편, 고급스러운 양탄자 위에는 에르윈 백작이 엎어져 있었다. 그의 등 뒤로 퍼진 검붉은 피는 양탄자를 깊게 물들여 있었다. 백작은 이미 시신이 굳어있는 듯, 기묘하게 뒤틀린 자세로 죽어 있었다.
나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방 안을 훑었다. 핏자국, 흐트러진 서류, 책상 위의 펜. 그리고… 백작의 왼손이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백작의 손가락을 풀었다. 그의 손바닥 안에는 작고 납작한 금속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무언가의 파편인 듯, 끝이 날카롭게 부러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루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금속 조각을 엄지와 검지로 들어 올린 채 방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책상 위, 서가, 벽난로, 굳게 닫힌 창문, 그리고 육중한 문.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이 모든 ‘제자리’ 속에 숨겨진 부자연스러움이 보였다.
“루크, 그레고르 대장.”
내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 방은 완벽한 밀실이 아니었네.”
두 사람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네? 하지만 태오 님, 모든 문과 창문은…”
나는 루크의 말을 끊고, 손에 든 금속 조각을 가리켰다.
“이 조각은 이 방의 밀실 트릭을 깨는 열쇠일세. 그리고 이 밀실에는, 범인이 사라질 수 있는 ‘틈’이 존재했지.”
내 시선은 방 한구석, 다른 가구들과는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작은 책장을 향했다. 그 책장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스크래치 자국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건 현장은 언제나 진실을 말하지. 우리가 그걸 읽어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말이야.”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불가능은 언제나 가능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