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묵령(天墨嶺)의 능선은 언제나 먹물을 풀어놓은 듯한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해발 이천 미터가 넘는 고봉들의 칼날 같은 실루엣조차 그 아래선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이진우는 낡은 등산화가 진흙을 밟을 때마다 쩍쩍 달라붙는 소리를 들으며 비탈길을 올랐다. 그의 손에는 너덜너덜한 고문서의 사본과 직접 제작한 듯한 조악한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진우 씨, 슬슬 발자국도 안 보여요. 여긴 짐승도 안 다닐 것 같은데.”
뒤따라오던 강미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녀의 어깨에는 진우의 배낭보다 훨씬 무거워 보이는 장비 가방이 얹혀 있었다. 닳고 닳은 전투복 차림의 미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숲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을 재촉했다.
“거의 다 왔어, 미나 씨. 분명 이 근처일 거야. ‘천묵의 눈물’이 흐르는 곳….”
진우는 중얼거리듯 답하며 고문서를 다시 확인했다. 수백 년 전의 언어로 쓰인 희미한 글자들이 그의 눈에는 마치 생생한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목적지에 다다른 것은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이었다. 가파른 절벽 아래, 굉음을 토하며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폭포수가 그들을 맞았다. 수많은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며 뿌연 물보라를 일으켰고, 거대한 물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계곡을 휘감고 있었다.
“천묵의 눈물… 과연 이름값을 하네요.” 미나가 감탄했다. “그런데 저 안으로 들어가자는 건 아니겠죠?”
진우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폭포 뒤편을 가리켰다.
“봐, 미나 씨. 저기 저 검은 실루엣. 폭포가 너무 거대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저건 자연적인 바위가 아니야. 완벽한 직사각형의 윤곽, 그리고… 어딘가 불길하게 빛나는 문양.”
진우의 말대로였다. 쏟아지는 물줄기 너머로 언뜻언뜻 비치는 것은 자연의 조각이라기엔 너무나도 인공적인 거대한 석벽이었다. 미나는 반신반의하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만에 하나, 들어가야 한다면 꽤나 고생 좀 하겠네요. 저 물줄기를 뚫고 가는 것도 일일 텐데.”
“고문서에는 물줄기가 마를 때를 기다리라고 했지만… 기다릴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해. 날씨가 더 나빠지기 전에.”
진우는 거침없이 폭포를 향해 걸어갔다.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을 강타했지만, 그의 눈은 오직 저 석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따랐다. 억센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자, 곧 거대한 석벽이 그들 앞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높이 족히 오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벽은 검은색에 가까운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표면에는 낯선 기하학적 문양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런 문명은… 기록에 존재하지 않아. 이건 역사를 새로 쓰는 수준이야!”
진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석벽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의 문양들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듯했다. 미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진우에게 물었다.
“이게 문이라면, 대체 어떻게 여는 건데요? 손잡이도 없고, 틈새도 안 보여요.”
“기다려봐. 고문서에는 ‘흐르는 물은 멈추고, 멈춘 별은 움직인다’고 했어. 이건… 일종의 수수께끼 퍼즐인 것 같아.”
진우는 석벽의 문양들을 유심히 살피며 손에 쥔 나침반과 고문서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석벽 중앙부에 새겨진, 다른 문양들과는 확연히 다른, 거대한 원형 문양에 멈췄다. 그 문양은 마치 태양과 달, 그리고 알 수 없는 별자리들을 형상화한 듯 보였다.
“이거야! 이 원형 문양! 이걸 돌려야 해!”
진우가 흥분해서 외쳤지만, 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커요. 맨손으로는 어림도 없을걸요? 게다가, 돌린다는 보장도 없고.”
“아니, 고문서의 그림이 이걸 가리키고 있어. ‘흐르는 물은 멈추고, 멈춘 별은 움직인다’는 건 아마 이 문양과 연관이 있을 거야. 태양과 달, 별들이 제자리를 찾으면… 멈췄던 물이 흐르고, 흐르던 물이 멈춘다.”
진우는 다시 폭포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문양을 봤다.
“물줄기는… 멈출 수 없어. 하지만 이 문양은 움직일 수 있어. 저 문양의 중앙에 뭔가 있어!”
그는 다시 벽에 다가가 원형 문양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문양 중앙에 움푹 파인 작은 홈을 찾아냈다. 손끝으로 그 홈을 살짝 건드리자, 마치 수백 년간 잠들어 있던 고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처럼, 석벽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진우의 고문서에 그려진 그림과 유사한 태양과 달, 별자리를 형상화한 문양들이 차례로 푸른빛을 내뿜으며 빛나기 시작했다.
“움직인다! 미나 씨, 저기를 돌려야 해! 분명 조작하는 부분이 있을 거야!”
미나는 진우의 지시에 따라 문양의 홈을 중심으로 힘주어 밀어봤다. 처음엔 꼼짝도 않던 거대한 원형 문양이 ‘끼이이익—’ 하는 끔찍한 쇳소리를 내며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고대의 기계장치가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소리였다.
수백 톤에 달하는 바위를 돌리는 듯한 힘겨운 소리와 함께 문양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태양 문양이 정확한 위치에 맞물리는 순간, 거대한 폭포수가 기적처럼 멈췄다. 아니, 멈춘 것처럼 보였다. 폭포의 물줄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투명한 막이 생긴 듯, 폭포수가 흐르는 물줄기 그대로 공중에 정지한 것이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폭포의 물줄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미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감탄사가 끝나기도 전에, 굉음과 함께 거대한 석벽의 중앙부가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고대의 문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대의 냉기, 그리고 퀴퀴한 흙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수직 통로였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이어지는 길.
진우는 손전등을 꺼내 심연을 비췄다. 빛이 닿는 곳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계단과, 벽면 가득 새겨진 기이하고 아름다운 문양들뿐이었다. 그러나 빛이 더 깊은 곳까지 닿으려 하자,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어둠이 빛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저 안에서… 뭔가 느껴져.” 미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오래된 것, 아주 오래된 것. 살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 죽어있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느낌.”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문명이 깨어나는 소리일지도 몰라.” 진우의 눈은 이미 심연의 통로에 매혹되어 있었다. “가자, 미나 씨. 우리가 찾던 곳이야. 잊혀진 심연의 서곡이 이제 막 시작된 거야.”
그는 주저 없이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미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따랐다. 어둠이 그들의 발자국을 삼켰고, 닫힌 문 뒤로 정지했던 폭포수는 다시 굉음을 내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지워버리려는 듯.
그들이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을 때, 주변의 공기는 더욱 차갑고 습해졌다. 손전등 불빛 아래 드러나는 벽면의 문양들은 더욱 복잡하고 정교했으며, 어떤 것은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푸른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심연의 별자리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이런 건축 양식은 본 적이 없어. 이 모든 게 단일 암석을 깎아 만든 것 같아. 수백 미터는 내려온 것 같은데, 인공적인 구조물이야.” 진우는 목소리에 경외감을 담아 말했다.
“그럼 얼마나 깊이 내려가야 하는데요?” 미나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끝이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저 소리 들려요? 뭔가 흐르는 소리.”
진우는 귀를 기울였다. 분명 아래쪽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단순한 지하수가 아닌, 거대한 강물 같은 웅장한 소리였다.
한참을 더 내려가자, 통로는 갑자기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곳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지하 동굴이었다. 동굴 천장은 까마득히 높았고, 양옆으로는 기둥처럼 솟아오른 거대한 암석 구조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은, 동굴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인공 호수였다.
호수의 물은 맑고 투명했지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호수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 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대의 제단 같기도 했고, 거대한 기계 장치의 일부 같기도 했다. 그 구조물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은 동굴 전체를 신비로운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세상에…” 미나마저 숨을 들이켰다. “이런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진우는 마치 홀린 듯 호수 중앙의 구조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고문서에서 읽었던 모든 전설과 신화가 이 순간 현실이 되는 것을 느꼈다.
“저걸 봐, 미나 씨! 저 문양들! 이건… 이건 고대 문명이 남긴 에너지원이야! 혹은… 별과의 교신 장치일 수도 있어!”
그가 구조물에 가까이 다가가자,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의 발아래에서부터 섬뜩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동은 점점 강해졌고, 호수의 물이 격렬하게 일렁였다.
“진우 씨! 위험해요!”
미나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호수 중앙의 원형 구조물이 굉음을 내며 서서히 수면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한 구조물의 움직임에 동굴 전체가 흔들렸고, 천장에서 작은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구조물이 완전히 수면 위로 드러나자, 그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단순한 제단이 아니었다. 거대한 원반 형태의 기계였다. 원반의 중앙에는 수정처럼 빛나는 거대한 구슬이 박혀 있었고, 그 구슬에서는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동굴의 모든 어둠을 삼키는 듯했다.
그리고 그 구슬 안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무언가가 보였다.
마치 고대의 눈동자처럼, 그 구슬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진우의 고문서에서 읽었던 잊힌 문명의 마지막 경고가 그의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심연은 깨어났으니, 역사의 흐름이 바뀔 것이다.*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절정에 달하자, 동굴 전체가 요동쳤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진우는 벅차오르는 감격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우린 지금, 잊혀진 역사의 문을 연 거야.”
그 순간, 거대한 원형 기계의 측면에서 ‘쉬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통로가 열렸다. 방금까지 완벽한 벽이었던 곳에서, 빛 한 줄기조차 스며들지 않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드러난 것이다. 그 통로 안에서는, 마치 무엇인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섬뜩하리만큼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채, 진우와 미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잊혀진 심연의 비밀은, 이제 막 그들을 손짓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