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미래의 잿빛 하늘 아래,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모든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땅,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강호의 영웅들이 쓰러진 자리엔 검은 그림자만이 춤을 추고 있었다. 흑마교의 철권통치 아래, 인간의 자유와 영혼은 질식한 지 오래였다. 나는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잔존 무인 중 하나였고, 그 지옥의 시작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천하의 운명을 결정했던 ‘천하쟁패전’의 파국이었다.
“되돌려야 한다…”
내 손에 쥐어진 작은 조약돌이 흐릿한 빛을 발했다. 마지막 남은 선조의 비술. 단 한 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 내 육신은 소멸하고, 영혼만이 백 년 전의 나약한 몸으로 돌아가는 위험천만한 도박.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멸망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리라.
결심이 서자 조약돌이 강렬한 섬광을 터뜨렸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의식은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
***
“와아아아!”
“청운검 류호! 이겨라!”
귀청을 찢는 함성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온몸이 쑤셨지만, 살아있다는 생생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쿵, 쿵, 쿵.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백 년 전, 바로 그 천하쟁패전의 무대.
나는 한 객잔의 구석 자리, 남루한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온몸에는 과거의 육신이 겪었던 듯한 상처 자국들이 선명했다. 다행히 내 영혼은 무사히 안착한 모양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수많은 인파와 함께 거대한 비무대가 아득히 보였다. 저곳에서 천하의 운명이 걸린 결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더 나약한 몸이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내공은커녕 기본적인 기력조차 형편없었다. 미래의 내 몸이 지녔던 파천의 무력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임무는 오직 하나, 파멸의 씨앗을 제거하고 올바른 역사를 바로잡는 것뿐.
나는 객잔을 나섰다. 온 거리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백 년 전의 무림은 이토록 활기 넘치고 맹렬했단 말인가. 내 기억 속 폐허와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에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다음 경기! 청운검 류호 대 혈안 독룡!”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드디어. 나는 걸음을 멈추고 비무대를 올려다보았다. 류호. 청운검 류호. 그는 미래의 내 기억 속에서 천하를 구원할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흑마교의 발흥을 막을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비무대에 선 류호는 내가 기억하는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달랐다. 그의 눈빛은 흔들렸고,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마주 선 혈안 독룡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음침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혈안 독룡은 흑마교의 앞잡이 중 하나였고, 그의 독술은 악명이 높았다. 미래의 역사는 류호가 혈안 독룡을 가볍게 제압하고 결승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류호는…
“크윽…!”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류호는 독룡의 비열한 독공에 휘말렸다. 날카로운 검기가 독안개에 스며들었고, 류호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졌다. 심지어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역사는 이렇지 않았다. 류호는 압도적이었다.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그는 독룡에게 패배하고, 흑마교는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터였다.
나는 몸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짰다. 미래에서 온 내 영혼만이 지닌 비장의 패. ‘심계제어(心氣制御)’. 내공이 아닌, 상대의 기운을 잠시 흐트러뜨리는 정신 제어술. 나의 기력을 모두 소진할 위험이 있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나는 비무대 쪽으로 달려갔다. 경기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류호에게 닿을 만큼 가까이. 그의 정신을 붙잡을 만큼의 거리.
“정신 차려라, 류호!”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나의 목소리는 수많은 함성 속에 파묻혔지만, 나의 ‘심계제어’가 실린 파동은 무대 위 류호의 뇌리에 정확히 닿았다. 류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지는 듯했다. 독룡의 독공에 잠식되던 내공이 일순간 정화되는 느낌.
그 찰나의 순간, 류호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하압!”
청운검은 구름을 가르는 용처럼 솟구쳐 올랐고, 혈안 독룡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대 밖으로 날아갔다.
“청운검 류호! 승리!”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류호는 비틀거리면서도 간신히 자세를 잡았다. 그는 무대 아래, 나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평범한 차림의 나를 어떻게 알아본 것일까? 그의 눈에는 의문과 함께 깊은 감사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첫 번째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류호가 결승에 올랐지만, 나의 불안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밤이 되자 나는 다시 한번 비무대 인근을 배회했다. 내 머릿속 미래의 기억은 파편처럼 조각나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선명했다. 류호의 승리. 그것만이 흑마교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다.
“허어, 꽤나 흥미로운 재주를 지닌 녀석이군.”
귓가에 속삭이는 섬뜩한 목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검은 장포를 두른 사내. 그의 눈은 깊은 어둠을 머금고 있었고,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내 몸을 얼어붙게 했다. 흑마교주. 미래의 세계를 파멸시킨 그 존재.
“감히 나의 계획을 방해하다니. 미래에서 온 쥐새끼라더니, 제법이군.”
그는 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이 나약한 육신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갔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상대.
“어리석은 녀석. 이미 늦었다. 내일 결승전, 섬광검 휘운은 류호를 꺾고, 내가 천하의 패권을 손에 넣을 것이다.”
섬광검 휘운. 나는 머릿속을 스치는 또 다른 기억의 파편을 붙잡았다. 류호의 마지막 상대는 분명… 섬광검 휘운이 아니었다. 미래의 역사에는 이 이름이 없었다. 흑마교주가 역사를 바꾸고 있었다!
“네놈이… 감히 역사를 농단하는가!”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흑마교주는 한 손을 휘둘렀을 뿐, 나는 저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어리석군. 이 몸으로 나에게 덤비다니.”
피를 토하며 쓰러진 나는 절망에 빠졌다.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내가 과거로 돌아온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흑마교주가 흘린 작은 조각이었다. 검은 기운이 서린 그것은, 분명 그가 미래의 나처럼 시간 여행을 했거나, 혹은 시간의 흐름을 조종할 수 있는 도구였다.
그것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었다. 미래의 멸망을 불러올, 사악한 힘의 근원이었다.
“젠장…”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포기할 수 없었다. 내일. 반드시 내일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
다음 날,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류호와 섬광검 휘운. 흑마교주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끌어들인 인물. 휘운의 검기는 마치 번개처럼 빠르고 강력했다. 류호는 어제 내 도움으로 겨우 컨디션을 회복했지만, 휘운의 압도적인 공격에 고전하고 있었다. 휘운의 검에는 흑마교주의 사악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크아아악!”
류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미래의 파멸이 다시 찾아올 터였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비무대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이 비무는 무효다!”
나는 격렬하게 소리쳤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사회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막으려 했다.
“저자는… 흑마교주의 사악한 기운에 물들었다! 이 비무는 공정하지 못하다!”
나는 휘운을 가리키며 외쳤다. 군중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휘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방진 놈! 감히 비무를 방해하는가!”
휘운은 나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의 검 끝에서는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감히 천하쟁패전의 권위를 모독하다니! 당장 끌어내라!”
사회자가 소리쳤지만, 나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의 목표는 오직 휘운. 그리고 흑마교주의 계획을 저지하는 것.
“감히 너 같은 하찮은 놈이 나를 상대하려 하는가? 네놈이 어제 류호에게 헛된 힘을 불어넣은 녀석이렷다!”
휘운은 나를 알아보았다. 흑마교주에게 내 정체를 들었으리라.
나는 주춤거렸다. 이 나약한 몸으로 휘운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비장의 수가 있었다. 흑마교주가 흘린 ‘사악한 힘의 조각’. 나는 품속에서 그것을 꺼내 들었다. 검은 조각은 섬뜩한 기운을 내뿜으며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흑마교의 힘인가!?”
군중 속에서 경악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휘운의 얼굴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흑마교는 아직 어둠 속에 숨어 활동하던 존재였기에, 그들의 힘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 조각은 너희 흑마교의 힘이 깃든 물건! 너희가 천하쟁패전을 조작하려 했다는 증거다!”
나는 힘껏 외쳤다. 흑마교주가 저 어딘가에서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의 계획을 송두리째 뒤흔들 절호의 기회.
“닥쳐라!”
휘운은 분노하여 나에게 달려들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섬광처럼 빠르고 날카로웠다. 나는 피할 수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 나는 조각을 움켜쥐고 내 온몸의 기력을 끌어모아 마지막 힘을 실었다.
“이 힘은… 천하를 위한 것이다!”
쾅!
휘운의 검이 내 어깨를 스쳤고, 동시에 내가 쥔 조각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사악한 기운이 폭풍처럼 휘운을 덮쳤다. 그것은 흑마교의 힘을 제어하는 힘이자, 동시에 그들의 힘을 역류시키는 파멸의 기운이었다.
휘운은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의 몸을 감싸던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그는 더 이상 섬광검 휘운이 아니었다. 단지 사악한 힘에 잠식당했던 한 명의 무인에 불과했다.
“젠장…! 이런 어리석은 짓을!”
어둠 속에서 흑마교주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가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휘운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온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내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성공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곧이어 진실을 깨달았다. 흑마교의 간계. 그리고 나의 희생.
류호가 내게 달려왔다. 그의 눈에는 걱정과 존경이 가득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어찌하여 이런 무모한 짓을…?”
나는 류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나는… 너의 앞날을 보았다. 그리고 네가 이 천하를 구할 영웅임을 믿는다. 이 힘을 받아라.”
나는 마지막 남은 나의 영혼의 힘을 류호에게 불어넣었다. 미래의 기억과 나의 강렬한 의지가 그의 내공과 섞여 들어갔다. 그것은 단순히 무력이 아니었다. 천하를 향한 책임감과 정의로운 의지, 그리고 파멸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
류호의 몸이 빛으로 감싸였다.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다른, 확고한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났다.
“나는… 천하의 운명을 바꾸었을 뿐. 이제 너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내 몸은 점점 투명해졌다. 영혼의 힘을 모두 소진한 대가.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잠깐! 당신의 이름은…!”
류호의 외침이 들렸지만, 나는 이미 세상의 소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사라진 곳에는 작은 조약돌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백 년 전의 맑은 햇살 아래 반짝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류호의 뒷모습을 보았다. 비무대 위에서 우뚝 선 그의 모습은 미래의 잿빛 하늘 아래 선 영웅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의 등 뒤에는 빛나는 희망이 가득했다.
백 년 후의 멸망은 이제 없으리라.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서서히, 완벽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