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 밤의 손님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로 한낮의 열기가 희미한 아지랑이처럼 춤췄다. 유진은 숨 막히는 빌딩 숲을 올려다보며 땀으로 축축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고작 2년 전만 해도 이 동네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유리와 철근으로 뒤덮인 거대한 마천루가 하늘을 찌르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아파트 단지는 흡사 거대한 성벽 같았다. 유진이 사는 곳은 그중 가장 신식이라는, 스물세 층짜리 아파트의 십오 층이었다.

“휴우…”

무거운 장바구니를 든 채 비밀번호를 누르자 ‘삐빅’ 하는 전자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텅 빈 복도가 그녀를 맞았다.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 고요함이 너무 묵직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마치 세상에 자신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숨 막히는 정적.

문을 닫자 바깥세상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거실은 깔끔했다. 며칠 전 새로 들인 디퓨저에서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희미하게 퍼졌다. 유진은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방금 마트에서 산 식료품을 채워 넣었다. 토마토, 시금치, 계란…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아침에 다 먹고 버린 빈 우유 팩이 냉장고 선반에 놓여 있었다.

‘내가 깜빡했나?’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빈 팩을 들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쓰레기통이… 왜 여기 있지?’ 쓰레기통은 싱크대 옆,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것도 뚜껑이 활짝 열린 채.

유진은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어제 과음한 탓일까. 술기운이 아직 안 가셨나.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유진은 휴대폰을 뒤적였다. 친구 지혜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말았다. ‘오늘 냉장고에 빈 우유팩이 다시 생기고 쓰레기통이 거실에 놓여 있었어.’ 라고 보내면 지혜는 분명 ‘너 정신과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술 좀 줄여!’ 라고 핀잔을 줄 게 뻔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아, 수도꼭지를 안 잠갔나?’ 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불은 꺼져 있었다. 욕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수도꼭지는 단단히 잠겨 있었다. 물이 새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낡은 배관이 내는 소리였을까? 이 새 아파트가?

“뭐야…”

유진은 으스스한 기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문득 욕실 거울을 쳐다봤다. 불 꺼진 어둠 속에서 거울은 희미하게 주변의 빛을 반사하며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거울 속 자신의 뒤편으로, 아주 잠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찰나의 순간, 거울 속 욕실 문이 아주 살짝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유진아. 피곤한 거야.”

유진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어둠이 낯설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며칠 뒤, 기이한 일들은 더욱 빈번해지고 노골적으로 변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탁 의자는 항상 제자리에서 비스듬히 밀려나 있었고,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어렴풋한 잔상이 남아있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밤이었다. 잠자리에 들면 귓가에 맴도는 희미한 속삭임. ‘흐으음… 흐으으음…’ 마치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잠결에 듣기에는 너무나 생생해서 섬뜩했다.

“나 혼자서는 안 되겠어.”

유진은 결국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지혜도 유진의 격앙된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야, 너 너무 피곤한 거 아니냐? 나 이번 주말에 너네 집 갈까? 가서 하룻밤 자면서 네가 뭐에 홀렸는지 좀 보자.”

“진짜 와줘. 제발.”

유진은 절박하게 부탁했다. 지혜가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누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기이한 공포가 사라질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었다.

토요일 오후, 지혜가 유진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잔뜩 겁먹은 유진의 얼굴을 본 지혜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말도 마. 너 오기 전에 냉장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어. 내가 닫았는데, 거실에서 보니까 또 열려 있더라. 내가 다시 닫으러 가니까 이번엔 불이 깜빡깜빡거려. 마치… 나를 놀리는 것 같아.”

지혜는 유진의 말을 듣고도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피곤해서 착각하는 거겠지.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파 죽겠네.”

둘은 마트에서 사온 재료로 저녁을 해 먹었다. 유진은 간만에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쩌면 그저 외로움이 만들어낸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지고, 지혜는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유진은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침대에 눕는 순간, ‘철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문이 잠기는 듯한 소리였다. 유진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유진은 잠결에 희미한 인기척을 느꼈다. 거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지혜야?”

유진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몸을 움찔거렸다. 문을 열었다. 복도 불은 꺼져 있었고, 거실에서는 희미한 텔레비전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혜야, 안 자고 뭐 해?”

유진은 조용히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는 아무도 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눈보라 같은 노이즈가 가득했다. ‘치이익… 쉬이익…’ 하는 소음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지혜야?”

유진이 다시 불렀다. 그 순간, 부엌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부엌으로 달려갔다. 컵 하나가 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야! 지혜!”

유진은 지혜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헤집었다. 화장실, 베란다, 심지어 신발장까지. 어디에도 지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유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지혜였다.

“야, 너 어디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지혜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지혜야! 너 어디야? 너 나랑 같이 있었잖아!” 유진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나 방금 너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어. 너네 집으로 올라가고 있어. 어젯밤에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지금 막 서울 도착했어.”

유진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지혜는 오늘 저녁에 오기로 했었다. 아까 같이 저녁을 먹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내 눈앞에 있었던 지혜는, 대체 누구였지?

그때, 유진의 뒤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낮은, 긁는 듯한 목소리.

“집에… 아무도 없잖아?”

유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실 한가운데, 어둠 속에서 흐릿한 형체가 일렁였다. 사람의 형상이라기보다는, 검은 연기가 모여 응축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왔다. 발소리도 없이, 마치 공간을 미끄러지듯.

“나… 외로웠어… 너무… 너무… 외로웠어…”

그 목소리는 유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낯선 어둠의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섬뜩한 울림이 있었다. 유진은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아? 왜 아무 말 없어? 너 괜찮아? 나 지금 엘리베이터 탔어!”

그림자는 이제 유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유진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림자는 서서히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피부가 얼어붙고, 뼈 속까지 시린 감각이 밀려왔다.

“이제… 혼자가 아니야…”

그림자가 속삭였다. 더 이상 유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두 개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듯했다. 그림자의 차가운 기운이 심장으로 파고들자, 유진은 정신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유진은 눈을 떴다. 거실은 여전히 어두웠다. 텔레비전의 노이즈는 사라지고, 화면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화면에는 지혜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수십 통. 그리고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유진아, 나 벨 눌렀는데 왜 안 열어줘? 너 자? 문 두드린다?]

유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문득, 거울을 발견했다. 거실 벽에 걸린 전신 거울. 유진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눈빛이 텅 비어 있었다. 입꼬리는 미묘하게 위로 향해 있었고, 마치 모든 것을 아는 듯한,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편으로, 텅 비어 있어야 할 거실 문틈에서, 아주 잠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아파트 현관에서 딩동, 딩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거울 속 유진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깊게 번졌다.

‘똑똑.’

이제는 거울 속에서, 마치 자신의 뒤에 누군가 있는 듯, 아주 희미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유진은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지혜야, 왜 이렇게 늦었어? 혼자 기다리느라 심심했잖아.”

낯선 목소리가, 유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